지난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 Parco Dora 광장에서는 테라 마드레 살로네 델 구스토 2024(Terra Madre Salone del Gusto 2024) 행사가 평화, 연대, 지속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국제 슬로푸드(Slow Food) 협회 주관 행사로, 2004년부터 시작돼 매년 토리노에서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식 페스티벌이다. 이 행사에서 전 세계로부터 모인 식품 생산자와 장인, 농업인, 요리사, 활동가, 음식 장인에 이르기까지 120개국에서 온 3,000여 명의 슬로푸드 대표가 함께 모여 슬로푸드 운동이 표방하는 Good(훌륭하고), Clean(깨끗한), 그리고 Fair(공정한)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공유했다. 국제슬로푸드 한국협회(회장 김종덕) 회원들은 비빔밥을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제공하여 전 세계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 주제는 ’We are Nature(우리는 자연이다)‘다. 근대 이후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인간의 자연 남용에 대한 반성으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할 때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줬다. 전 세계의 다양한 분쟁과 지정학적, 사회적 도전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와 연대를 촉구하는 사람들에게 테라마드레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친서를 통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기후 위기와 사회 위기가 함께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며, 생물 다양성을 수호하고, 삼림 벌채를 멈추며, 낭비를 줄이고, 신재생 자원으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이 평화의 길을 추구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핵심 키워드 '프레시디아'
생산 지역별 부스를 돌면서 치즈, 와인, 살라미 등 슬로푸드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부스별로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프레시디아(presidia)'였다. 그만큼 프레시디아는 슬로푸드 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재된 품목의 생산자 집단으로, 방어하다, 보호하다, 지킨다는 의미다. 가만 놔두면 지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다양한 토종 씨앗과 농수축산물 및 그것을 이용해 만든 질 좋은 식품과 음식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슬로푸드 운동 프로젝트 중 하나다. 프레시디아는 그 지방 고유의 종들을 지키는 한편 지역 특색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은 물론 음식을 통해 정체성과 역사를 보존하는 일에 힘쓴다.
앞서 언급한 맛의 방주는 노아의 방주처럼 소멸 위기에 처한 종자나 식재료를 찾아 목록을 만들어 ‘맛의 방주'에 승선시켜 지역 음식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국제 프로젝트이다. 한국에서는 2013년 제주 푸른콩장을 시작으로 금년에는 파주의 장단백목콩 등재를 포함해서 6개가 등재돼,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총 117개의 맛의 방주 품목을 갖게 됐다. 맛의 방주에 등재되는 품목은 그 목적에 맞게 선정 기준도 매우 까다롭다. 우선 특징적인 맛이 있어야 함은 물론, 특정 집단의 기억 및 정체성과 연결돼야 하며,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던 다양한 종과 환경친화적인 동식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테라 마드레 살로네 델 구스토 2024에서 주목할 사항은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슬로푸드 팜(Slow Food Farm)을 선정한다는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슬로푸드 팜은 농업 생태학적 원칙에 뿌리를 둔 방식으로 Good(훌륭하고), Clean(깨끗한), 그리고 Fair(공정한) 식품을 생산하는 데 전념하는 농장을 선정하여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슬로푸드 팜은 농장을 회복력 있는 지역 식품 시스템에 통합함으로써 농가의 생계를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공정한 보상과 장기적인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할 것으로 보인다. 슬로푸드 운동은 이러한 농부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키고, 오랫동안 이 운동을 지지해 온 활동가, 요리사, 소비자, 식품 장인, 농업인, 어업인 등을 연결할 예정이다.
현재의 식품 시스템은 효율성과 이윤을 최우선으로 삼아 운영되고 있다. 대규모 자본 투자와 자동화를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된 제품으로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서구 근대 문명의 전형적인 경제 모델이었다. 이러한 자본 중심의 경제 효율 추구는 심각한 환경 문제를 야기해왔다. 대기와 해양 오염, 삼림 파괴, 천연자원 고갈, 지구 온난화 등은 모두 이로 인한 부작용이다. 또한 대형 체인점의 확산으로 인해 전통적인 상권과 지역 경제가 붕괴되는 현상도 발생했다. 특히 대규모 농업과 글로벌 식량 공급망은 기후 위기와 생물 다양성 손실, 그리고 필수적인 천연자원의 고갈을 촉진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인간의 복지마저 위협하고 있다. 소규모 농가와 지역 사회는 이러한 변화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으며, 자연재해와 보건 위기, 그리고 불안정한 시장 상황과 끊임없이 맞서 싸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슬로푸드 운동은 농업인부터 식품 장인, 의식 있는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 동물, 지구에 대한 존중으로 식품을 생산하고 소비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
슬로푸드 운동은 생물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효율성을 중시해 생겨나고 있는 표준화·획일화가 다양성을 줄이고, 다양성 감소가 지속가능성에 위기를 가져오는 것에 주목한다. 단기간에 보다 많은 성과를 내고자 하는 현대 기계문명은 효율성에 기초를 두고 있고, 속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슬로푸드 운동은 생물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지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는 다양성이 효율성에 저해가 된다고 보고, 표준화·획일화 방향으로 나아갔다.
농업에서는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던 농업이 산업 시간을 적용한 산업형 농업으로 바뀌었고, 이는 지역농업의 특성을 사라지게 하고, 음식 다양성도 줄어들게 했다. 패스트푸드의 확산은 다양한 지역기반 음식과 음식문화가 사라지게 했다. 슬로푸드 운동은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고 본다, 슬로푸드 운동이 중시하는 다양성은 생물 다양성은 물론이고, 문화 다양성, 지역다양성, 음식 다양성, 언어 다양성 등 여러 다양성을 포함한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는 의식주이며, 그중에 음식은 단순한 생존 수단을 넘어 개인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식은 삶의 근본이자 경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류 역사의 흐름을 좌우해 온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슬로푸드 운동이 지향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농업과 다양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현대의 빠르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식문화 속에서 느린 음식, 즉 슬로푸드를 선택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은 포기하기 쉽고 어려운 과정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푸드 운동은 단순히 음식을 넘어, 우리가 사는 생태계와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환경을 물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운동을 통해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음식과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먹거리와 농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후대에 물려주는 데 기여하는 깊은 의미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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