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
이렇게 추웠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진짜 사상 초유의 추위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번 겨울이 제일 춥다. 코로나 때문에 집 밖을 나가지 않아서 거의 집에만 있는데도 춥다. 키보드 치느라 소매가 살짝 올라간 손목에 닭살을 달고 살 정도로.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난방 온도를 좀 올리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무슨 얼어 죽을 절약정신이 몸에 밴 건지 온도 올림 버튼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그냥저냥 보온 물주머니, 플리스, 조끼, 따뜻한 커피나 차 등등 이런 것들 총동원해서 추위를 버틴다.
이렇게 추위와 싸우며 번역을 하다가 가끔 상상 여행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막 설레면서 가슴속에 온기가 사르르 퍼지고 어느새 추위를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상상 여행은 내가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상상 여행이란 말 그대로 머릿속으로 어느 도시를 여행하는 건데 포인트는 가고 싶은 나라이거나 가 본 나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참 번역을 하다가 저자가 어느 도시를 - 특히 외국 -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나오면 굉장히 생동감 있게 느껴지면서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기분이 든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도 가뭄 속 단비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쩌면 지루하고 고루한 번역 작업 속에 나도 모르게 찾아낸 힐링 포인트 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요즘 같이 해외여행이 힘든 시기엔 그 반가움이 더 극에 달해서 작업을 하다 말고 비행기표가 얼마인지 검색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언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만한 여유도 없으면서.
이번에 번역하는 작품 <퀸스 갬빗>은 주인공이 파리, 뉴욕,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고 그 도시를 느끼는 인물의 감정 묘사와 장면 묘사가 나름 섬세하다. 이번 책은 체스 공부를 하며 번역을 해야 해서 - 체스 신동 이야기다 - 골머리를 앓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중창 틈새로 새어드는 혹한의 추위에 닭살을 달고 살긴 하지만, 상상 여행을 자주 할 수 있어서 좋긴 좋다. 나는 뉴욕을 가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괜스레 마음이 부푼다.
상상 여행이 코로나 + 혹한, 이 원투펀치를 버틸 수 있게 해 줘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