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을 얻는 일

by 김보리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오히려 쓸쓸해진다. 그럼에도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져 가고, 그럼에도 우리는 저마다 이렇게 외롭게 살다 저물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더욱 착잡해진다. 기다리던 새싹은 나지 않고, 떨구지 못한 눈물 같은 빗물을 머금은 은행나무의 마른 가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서글프다.


외로움에 지지 않으려 다정함을 떠올린다. 다정함. 다정한 마음. 다정한 태도. 대가 없이 다정해지던 순간. 우린 모두 연결돼 있어요.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 남을 살피는 마음. 그러지 않곤 이 삭막한 세상을 꼿꼿이 견디기 어려우니, 보살피고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고. 봄비가 처연한 창가에 앉아 다정함의 기억으로 괜히 무거워지는 마음을 달래 본다.




건물을 살피는 이모님의 마음을 확실히 얻었다. 전화 세 통으로 충분했다. 어느 날 이모님은 평소와 달리 내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으셨다. 열 걸음쯤 가까이 다가오신 후 커다란 손동작을 덧대어 황망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아고 아고, 미안해요. 내가 버스에 안경을 두고 내려서, 누군지 못 알아봐서 인사를 못했네. 응.... 홀랑 버스에 두고 내렸지 뭐야. 으응...? 왜 아니야, 비싼 거 맞어. 맞춘 지 보름도 안 됐는데, 에효. 늙으니까 자꾸 눈이 시어서, 색깔도 넣어가지고 큰맘 먹고 맞춘 건데......”


말씀이 긴 것은 속상함이 큰 것이리라. 수시로 버스에 무언가를 흘리고 다니는 나, 주저함 없이 순서를 밟았다. 버스 번호를 묻고, 승차 시간, 승차 장소, 하차 장소를 여쭈었다.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꼼꼼히 질문했다. 해당 버스가 미처 들어오지 않았으니 다시 전화를 달라고 직원은 말했다.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흘린 물건이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내 손으로 살아(?) 돌아오는 아름다운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안심을 시켜 드렸다. 이모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돌아서는데 이모님은 다른 걱정을 더하셨다.

“찾는다고 해도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찾으러 가나......”

계단을 오르며 혼자 답했다. 제가 찾아다 드릴게요. (물건 찾으러 이미 드나든 적 있어서) 어딘지 알아요.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 오지랖에 내가 놀라며, 종일 세상이 부옇게 보일 이모님이 안타까웠다.

안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 번쯤 전화를 해보았으나 허사였다. 큰소리쳐놓고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 맘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나 절박하셨건만, 이모님은 찾고 못 찾고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친절해지셨다. 내 차가 모습을 나타내면, 옹색한 주차장 자리를 서둘러 봐주시고, 행여 외부 사람이 차라도 대놓고 있으면 부지런히 쫓아내 주셨다. 쓰레기 버리기도 편하라고 이런저런 형편도 봐주셨다. 그 배려가 감사해, 7730번 버스가 지날 때마다 이모님과 이모님의 안경을 떠올렸다.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아닌데........ 어딘가 있을 텐데....


한 달은 족히 지났을 무렵, 이모님이 내 차를 보자마자 분주히 다가오신다. 찾으셨단다. 가만 생각하니 그날은 늘 타던 버스가 아닌,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고 오셨다고. 뒤늦게 생각나 부리나케 내가 하던 양으로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안경의 위치를 파악한 후 알음알음 길을 물어 버스 회사에 다녀오셨단다. 안경다리를 매만지고 안경 코를 올렸다 내렸다 하시는데, 말씀 따나 제법 비싸 보였다. 다행이다. 안경을 찾으셔서. 다시 눈이 밝아지셔서. 그렇게 나는 전화 세 통으로 이모님의 마음을 얻었다.




여행작가협회 소모임 ‘제주홀릭’에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사흘간 함께 여행하던 중, 세 째날 아침이었다. 다들 숙소 뒤 오름과 둘레길을 걸으러 나서고, 큰 식당에 나만 혼자 남았다. 그날 안에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어 양해를 구하고 남았던 차이다.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누군가 되돌아오셨다. 말씀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D 선생님. 사정을 여쭈니, 허리가 아파 더 걸으면 무리가 될 것 같아 걸음을 돌리셨단다. 식당 위에 구부정히 몸을 기대 엎드려 계시는 모습을 모른 척하기 뭐해 몇 마디 말씀을 주고받았다. 방 열쇠는 다른 일행이 가지고 있는데 미처 받아오지 못하셨다고.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내 방 열쇠를 드렸다. 못해도 한 시간 반쯤은 더 기다리셔야 할 텐데, 식탁에 엎드려 계시긴 무리지 싶었다. 같은 방을 썼던 두 분께 굳이 물을 이유도 없었다. 같은 마음이었을 테니.


손사래 치며 거절하시는 D 선생님 등을 밀어 내 방으로 가시게 했다. 뜨끈한 온돌방에 누워 계시다 보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시겠지 생각하니, 내 허리가 다 곧게 펴졌다. 예측하겠지만, D 선생님은 베푼 친절의 몇 배로 고마움을 표하셨다. 한참 지나 신년회 모임서 뵀을 때도 감사의 표현은 줄지 않았고, 훗날 우연히 나의 친구를 만났을 때에도 ‘보리어천가’가 끊이지 않더라고 친구는 익살맞게 표현했다. 또 그렇게 나는, 너무도 쉽게 사람의 마음을 얻고 만 것이다.


D 선생님은 최근 시작한 나의 작은 책방 '삼층서가' 책모임의 가장 열렬한 팬이 되어 주셨다. 모임에 오셔선 나의 책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를 두 권이나 구매해 주셨다. 지방에 살고 있는 친구가 요즘 너무나 외로워하고 우울해한다며, 나머지 한 권을 보낼 예정이시란다. 두 번째 책모임을 위해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을 구매하시며, 역시 이것도 친구에게 보낼 요량이니 두 권을 주문해 달라고. 앞으로 모든 책은 당신과 친구를 위해 두 권씩 주문해 달라고 하신다. 선생님도 이렇게나 정이 많으셨구나. 다정한 사람이 다정함을 알아보는 법이지. 그렇게 우린 모두 연결돼 있다. 다정함으로, 배려로, 보살핌으로.




나의 선행을 대놓고 만방에 떠드는 이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냐면, 당신도 그런 사람인 줄 알기에. 우리는 이런 작고 소소하고 무용할지도 모를 별 것 아닌 일로 내 앞의 한 사람을 데워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다정함을 놓지 말자. 대단한 것을 주려 말고, 손 안 닿는 곳을 긁어주듯 상대가 어쩌지 못하지만 나에겐 무리되지 않는 다정한 배려를 멈추지 말자. 내가 1이 불편해 상대가 3이나 4만큼 혹은 그 이상 사는 게 수월해진다면, 그 1을 감수하자. 3이나 4만큼 마음을 얻게 될 터이니. 외롭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엔 그보다 나은 게 없으니.


요즘 매일 염불 외듯 외우고 사는 말, 며칠 전 책에서 읽은 구절 세 줄을 옮기며 글 문을 닫는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보살핌과 배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아잔 브라흐마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시 올래? 다시, 올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