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스에 다시 섰다. 안녕, 제주. 오랜만이야. 언제고 다시금 올레를 걸으려 했다. 나로서는 가장 심플한 길이고 난이도 역시 꼭 맞춤하다. 대개는 쉽고 가끔 한 번씩은 고단해 넋 놓고 걸으멍 하다가 이따금 정신 바짝. 고비를 넘기고 나면 나를 기특히 여기며 막걸리 한잔 마시며 길 하나를 완성한다. 제주 아무 데고 놀러 갔다 근처의 아무 올레 시작점에 서면되니 특별히 여행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어느 길이든 대개는 숲길과 산길, 바닷길, 밭길, 마을길 등을 고루 품고 있다. 지루할 만하면 요 길 조 길로 나를 넣다 뺏다, 들었다 놨다 해준다. 마을마다의 전설이나 스토리, 슬픈 역사의 흔적을 마주하며 숙연해지기도 한다. 23년 4월 7일에 16코스를 마지막으로 첫 완주의 쾌거를 이루었으니, 2년이 조금 안되어서 두 번째 올레에 선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갈래? 응, 다시 올레!
이번 제주는 우연찮게 시작됐다. 인스타 포스팅에 여작교 후배님이 올레길을 꼭 한 번 같이 걷고 싶다 청해 주셔서 2월쯤 같이 걷기로 1월 초에 약속했다. 둘이 걷기 면구스러워 절친을 동원하고, 걷기 도사 작가님 두 분께 청을 드려 5인 팀을 만들었으나 한 분이 사정상 빠지고 넷이 걷게 되었다. 교집합으로 모이는 일정은 화수목 삼일. 올레를 다시 시작하고픈 나의 의지를 담아 올레 1코스를 걷기로 했고, 나머진 그때그때 맘 가는대로. 친한 듯 안 친한 듯 서먹하게 시작해 서로 놀려먹지 못해 안달 난 짓궂은 누나 동생 형아가 되어 헤어졌다. 주로 내가 놀려먹었으니, 서먹하던 두 냥반에게 역시나 나는 주책바가지, 말 많고 방정맞은 아줌마로 이미지를 굳혔겠지. 나 진짜, 낯설고 부끄러워 그런 건데.
하늘 색 바다 올레 패스프트에 완주 도장을 모두 찍었으니, 이번엔 주홍이, 당근 패스포트를 구매했다. 패스포트를 포함, 올레 굿즈는 하나같이 예뻐서 다 사서 모으고 싶지만, 가능하면 사지 않는 삶을 실천하려는 중이기에 양말 외에 딱히 산 것은 없다. 양말은 기막히게 좋다. 1코스 시작점에서 첫 스탬프를 찍으며 뜻밖에 마음이 진동한다. 아, 다시 시작. 이 느낌도 기막히게 좋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시작이 남은 길 모두를 다 걷게 해줄 거라는 확신으로 기운차게 길 위에 나를 세운다. 어쩌면 반 이상의 시작. 그렇게 다시 올레.
1코스는 초반부에 말미오름, 알오름을 차례로 오르고 나머지는 느긋하게 평지 길만 이어지니, 여기야말로 시작이 반이란 말에 꼭 맞는 곳이다. 길을 시작하고 3,40여 분만에 루트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기에 여기서 정상주를 마시자며 막걸리 한 잔씩을 기울이니 후배님이 기가 차 한다.
“엥. 얼마 걸었다고, 벌써 뭘 먹어요?”
정상주는 정상에서 마서야 하니까요.....
목화 휴게소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은 후, 통통한 반건조 오징어 구이와 맥주 한 캔씩을 가붓하게 비운다. 오징어가 현금가로 만이천원에 달하기에 왜 이리 비싸냐 물으니 나 빼곤 다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싼 거라는 것을. 맥주 한 캔에 이천오백원인 것은 마냥 고맙다. 그래서 두 캔 먹은 인간도 있다. 오징어가 든든해 두시가 넘어서야 오조리 해녀의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말이 해녀의집이지, 평범한 식당과 다르지 않다. 술값도 오히려 비싸고, 해녀 할머니도 푸근하지 않다. 물미역 무침이 너무 맛있기에 사갈 수 있냐 여쭈니 매정하게 안 된단다. 청을 하면 때때로 공짜로 싸주시는 로컬 식당들도 많은데, 야박한 제주에 내 마음도 못되진다.
애주가로 구성된 여행에서 운전은 고민거리다. 한 분이 운짱을 자처하셨으나, 운전이 힘든 건 일도 아니고 술을 참으셔야 하니 보통 안타까운 게 아니다. 저녁은 숙소 직원 분이 식당에 내려주셔서, 야무지게 취한 후 택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시리는 삼 대씩 이어오는 두루치기 맛집이 서너 개인데, 여긴 신통치 않다. 유일하게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 그저 편하게 먹고 마신 데에 의미를 둘 뿐.
둘 째 날엔 후배님이 추천한 맛집을 찾아 서귀포로 내려간다. ‘맨도롱해장국’에서 쟁이해장국과 보말해장국을 후루룩 한 그릇씩 비우며 제주막걸리를 기울인다. 저녁때까지 차 쓸 일 없게 일정을 짜놓고 운전자에게도 술을 권한다. ‘아침부터 또 막걸리를?’. 문장 하나가 후배의 눈에 아른거리지만, 그 역시 즐기는 눈치라고 내 맘대로 해석한다. 제주막걸리의 북방한계선은 추자도. 그러니 마실 수 있을 때 마셔야 하는, 숙명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후배가 추천한 유동커피에서 잠깐 쉬었다가 버스를 타고 쇠소깍으로. 6 코스는 십 키로 쯤이라 부담이 없다. 중간 스탬프는 종착지 거의 다 되간 지점 ‘소라의 성’에서 찍게 된다. 예전엔 해물뚝배기 전문, 관광객이 주를 이루는 식당이었고 지금은 작은 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 창에 든 바다 뷰가 예쁜 곳이라 서귀포에 묵을 땐 이따금 들르던 곳. 서가에 내 책이 꽂혀 있기에 채신머리없이 오두방정을 떨며 후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 했다. 제주에 관한 책을 죄다 모아둔 책장에서 찾았으니, 되게 신기한 일은 아니나, 초짜 작가로선 적이 뿌듯하더이다. 저녁도 후배 추천 돔베고기 집 ‘천짓골식당’에서. 고기를 덩이 째 테이블에 갖다 놓고 칼을 놀리시는 여사장님이 멋지다. 운짱은 술을 하지 못하고 콜라와 사이다를 거푸 비운다. 고기를 덜 하는 나는 막걸리만 연신 마셔댔다. 운짱님을 위해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 숙소에서 한 잔 더 기울이고 하루를 마감했다.
사흘 차엔 설렁설렁. 평소 식당을 맘에 담지 않는 내가 그나마 제주에서 가장 좋다고 꼽는 곳, 동복리해녀잠수촌. 전복죽, 회국수, 해물라면 등이 만원이라 다른 해녀의집보다는 저렴한 편이다. 라면에 든 문어가 포실하니 맛있어서, 따로 반만 삶아 달라 청하니 그 역시 만원에 흔쾌히 들어주신다. 이곳의 맹점은 제주막을 팔지 않는다는 것인데, 외부에서 사 들고 가는 것을 허락하시기에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술값이 싸게 먹히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을 동행들이 좋아하니 기쁘다. 날이 풀리면 해질녘 야외에서 꼭 한 잔 하시길. 노을의 속도로 취할 것이외다.
세화오일장 맛나분식에서 튀김을 먹으려 바다가 예쁜 세화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제 돔베고기집에 이어, 다음의 먹기를 위해 애써 시간을 보내는 기이한 여행을 하고 있다. 일행 중 둘이 카페에서 유유자적 할 때, 나와 다른 이는 바다 앞 방파제에 쪼그리고 앉아 맥주를 찌끄렸다(찌끄린단 말에 후배는 많이 놀라더라^^). 오징어 튀김과 고추 튀김을 사들고 바닷바람 싸대기 맞으며 홀짝이는 맥주 맛은, 음.... 되게 추웠다. 추운 것 이상, 짜릿하고 좋았다. 이 맥주 맛은 오래 기억될 거라고 동행이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며 그 맛을 되새겨야지.
종로 3가 보쌈집에서 모여 부암동서 자리를 이어가기로 하고 굿바이. 아쉽게 헤어졌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위해, 서로를 위해 할 만큼 다했고 진도 다 빠졌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만큼 다 쓰고 작별하니 좋다. 더 끌어 쓰느라 애쓰지 않아 좋다. 최근 들어 이런 여행에 익숙해지고 있다. 조금은 서먹한 이들과 어울려 하는 여행. 감상에 젖지 않아 좋다. 내내 고독한 혼자 여행에 비해 많이 웃고 많이 논다. 다채롭게 끼니를 때운다. 밝은 내가 된다. 너를 웃기려다 내가 웃는다. 네가 웃어 내가 웃는다. 슬픔도 지쳤다. 술만 먹으면 슬퍼지는 것도 질린다. 그러니 어쩌면 점점, 여럿에 스며든 여행을 더 많이 하게 되려나. 그러다 가끔 혼자 걸으며, 슬픈 나는 그때 달래줘야지.
다시 올레. 일 년 동안 느긋이 걸을 예정이다. 한 때는 걷는 일에 무슨 증명이 필요하냐며, 도장 찍고 완주 증 받는 남의 일을 가벼이 본 적도 있다. 걸어보니 알겠다. 하나를 완성하고 스탬프를 찍는 일은 남에게 보이는 증명이 아닌 나를 향한 증명이다. 증명과 확인이 필요한 나이에 닿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붙잡고 갈 만한 선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첫 완주 증서를 여태 안 받았는데, 두 번째 완주 전에 받으러 갈 수 있으려나. 이번에 걸어보니 같이 걷는 길도 나름 좋았기에 이따금 ‘올레 걷기 번개’를 칠까 생각도 해본다. 맘이 동하면 당일 여행으로 하나씩 걸어봐야지.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뿌듯할까.
여행도 성장한다. 여행도 품을 넓힌다. 길은 둘이 걸을 만큼은 넓다. 나란히 걸을 만큼 길다. 올해의 올레는 다시 올레, 같이 올레, 따로 또 같이 올래 올레. 너도 올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