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발리 여행 후의 기록
3주간 인도네시아에 다녀왔다. 첫 주는 혼자 지냈고, 둘째 셋째 주엔 TC(Tour Conductor)로서 인솔하는 투어 팀과 함께 했다. 족자카르타 - 발리 여행(이름하야 '족발 원정대')은 단 하나의 흠결도 없이 마무리되었다고 자평한다. 소규모에 지인 위주의 구성이니 뭐 탈 날 게 있겠나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열흘 이상 이어지는 여정은 친한 친구끼리도 탈이 나려면 날 수 있는 기간이다. 무난하게 여행이 돌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현지의 좋은 여행사를 컨택했던 덕이 크다.
족자카르타는 내가 맡고, 여행사 대표인 진우석 작가님이 브로모와 이젠 화산, 스노클링 일정을 맡아 진행해도 별 무리는 없을 여행이긴 했다. 이후의 우붓과 사누르야 별 어려울 게 없으니 고려할 이유도 없고. 그럼에도 우리는 둘 다 여행 상품 진행에 있어 초보임을 인정하고 과감하게 여행사를 끼기로 했다. 노련한 여행사의 기술도 배울 겸, 괜한 실수로 동행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 했던 선택인데, 돌아와서 되짚어 보니 역시나 그 덕을 많이 봤지 싶다. 소개해 .준 족자카르타 숙소 ‘아마이레 족자’의 쥔장Dian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여행사에 다음 2차, 3차 여행을 의뢰하며, 1차 여행에 대한 전체적인 리뷰를 적어 보냈다. 스쳐간 가이드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며 리뷰는 저절로 글이 되어간다. 대여섯 명의 가이드 혹은 기사들은 하나같이 좋았다. 우리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유난히 다정하다는 나의 견해가 환상만은 아님이 입증된 걸까. 혹은 여행 업계 사람은 다 그런 건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우리 곁엔 늘 좋은 인니 사람들이 있었다. 기록으로 꼭 남겨두고 싶을 만큼.
족자카르타에 일주일 미리 들어가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중, 가장 부담스러운 일은 여행사 직원을 만나는 일이었다. 굳이 먼저 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안 할 거면 뭐 하러 일찍 들어왔나 싶기도 해 시간을 내 사무실을 찾아갔다. 매니저 아리오(Ario)는 동글동글 볼이 빵빵한 사십 대 즈음의 남자. 첫인상은 그리 믿음이 가진 않았으나, 전체 일정에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야무지게 진행해 주었고, 무엇보다 그때그때 빠른 타이밍으로 소통해 주니 차츰 미더워졌다. 소소한 부탁도 잘 알아서 처리해 주는 세심함도 돋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십 대 중반에서 네 살까지, 자식이 여섯이나 되었다. 거기서 오는 책임감이었을까. 그에 대한 믿음으로 2차도, 3차도 쭈욱 일을 맡기기로.
족자카르타를 떠나기 전까지 나흘간 함께 한 운전사 파나(Faana)는 사랑스럽다. 말이 없지만 태도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친절하고 다정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맥주가 시원하지 않아 얼음이 필요할 때 우리보다 더 애달파하며 구해주려 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운전 스킬도 최고. 나와 진작가님은 다음 여행 때도 꼭 파나를 운전석에 앉혀 달라, 리뷰에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한국어 가이드를 요청한 것은 전반적인 진행을 위해서가 아닌, 보로부두르 사원과 프람바난 사원에서 역사적인 지식을 풍요롭게 듣기 위해 했던 선택인데 이 부분은 사실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조노(Jonoh)는 자기 이름이 한국어로 생선 이름이라며 ‘전어’라 부르라 했다. 전어, 전어, 입에 착착 붙는 이름이라 자주 불렀다. 일본어 가이드가 본업이라 한국어는 조금 어설펐다. ‘여기서~’라는 단어를 “음~” “에~” 같은 사잇말처럼 수시로 사용해 한 동안 혼란스럽기도 했다. 예를 들면 부처의 인생을 설명하는데 계속해서 “여기서~, 여기서~” 해대니, 부처가 계속 ‘거기(여기)’에 있는 줄 알았다고나 할까. 훗날 ‘여기서’는 우리끼리의 유행어가 되었다. 할 말이 없거나 머쓱할 때, 뭔가 받아쳐야 할 때, “여 기 서 ~~~!”라고 자주 읊었다. 안타깝게도 전어 선생님은 다음 여행에서 함께 하지 못할 듯.
족자카르타에서 수라바야까지 네 시간 기차를 탔다. 족자의 여행사가 연계해 둔 현지 여행사 직원이 이름표를 들고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나. 어찌나 깨방정으로 환영하던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가이드 겸 운전사 유디(Yudi)는 꽃미남으로, 내 눈엔 딱 젊은 주윤발처럼 보였다(주윤발이 누군지 모르기에 사진 찾아 보여줌). 내내 담배를 피워대는 그는 이제 스물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데, 벌써 두 아이의 아빠란다.
요 발칙한 녀석이 엄마뻘 되는 우리 넷을 와이프 1, 와이프 2, 3, 4 해가며 장난을 건다. 또래라면 불쾌했을지 모르겠다만 귀여워서 냅뒀다. 모든 순간에 아내를 대하듯 다정하게 지켜준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남자들도 차별하지 않았으니, 좋은 가이드였음이 분명하다. 까불까불 하면서도 운전만큼은 차분하다. 질문에도 진지하게 답한다. 맥주 많이 마시고 호텔 갈 때, 화장실이 급해 차분한 운전 방해한 거, 미안해요(죽는 줄 알았다. 뒤통수 후려칠 뻔).
무슬림이지만 가끔은 술을 마신다고. 한국 소주도 좋아해 정말 가끔 친구들과 돈을 모아 한 병 사 먹기도 한다기에 8월에 소주 한 병을 사다 주기로 약속했다. 예민한 사람들도 있으니, 고객에게 ‘아내’ 발언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 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 왓츠앱으로 얘기해 줘야 할까.
이젠 화산에서 가이드해주었던 와르노(Warno). 세상에 이런 까불이가 있나 싶을 만큼 말 많고 웃음 많고 동작 큰 40대 남자. 특히나 그는 사진을 기막히게 잘 찍어주었다. 여행 내내 느낀 게 사진 찍어주는 것도 가이드의 아주 큰 소임 중의 하나임을, 사진 실력도 가이드의 필수 능력 중 하나임을 절감했다. 족자카르타의 전어 선생도, 와르노도 기막히게 좋은 포토존을 지정해 주고, 사진은 물론 드라마 같은 동영상을 거푸 찍어 주었다. 특히나 와르노는 ‘휴먼 드론’이라 불릴 만큼 생동감 있는 동영상을 단체는 물론 개인 별로 촬영해 주어 각자에게 인생사진과 영상을 남겨 주었다.
이젠 화산에서 유황을 캐는 노동을 하다가 힘들기도 하고, 유황이 많이 나지도 않아 죽기 살기로 영어를 배워 가이드로 전업했다고 한다. 그 시절(10년 전)엔 20킬로를 지고 가면 1달러, 지금은 10킬로를 지면 1달러를 준단다. 다수의 유황 노동자들은 이젠 산의 트롤리 운전사로 전업했다. 알록달록 치장한 리어카를 옆에 끼고 “람보르기니~” “벤츠~” “도요다 도요다~” 목소리 높이며 영업한다. 제법 가파른 경사 구간과 험한 바위 길을 끼고 있는 왕복 8킬로미터의 등산로. 오륙십 대의 깡마른 남자들이 사람 하나를, 때론 둘을 태우고 그 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왕복 십만 원이 넘으니 제법 큰돈이기도 하다. 손목은 성할까. 팔씨름하면 이길 한국 남자 없을 듯. 누군가의 단단한 일상을 괜한 연민의 시선으로 재단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래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싸했다.
와르노에 대해서도 극찬의 리뷰를 적었다. 역시나 8월 이젠 화산에서, 꼭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매니저에게 청했다. 살 좀 빼서 나도 인생 동영상 하나 얻어야지.
마지막으로 와얀(Wayan). 발리 페무테란(Pemuteran)의 소노클링 숍 직원(혹은 사장?). 개그맨 이봉원을 닮은 가벼워 보이는 얼굴에 그보다 더 가벼운 언사로 좋은 첫인상을 주기 어려운 외모. 게다가 좀 느끼하게 지분대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최고의 스노클링 가이드 적임자였다. 지난 1월, 라자암팟(Raja Ampat) 바다 한가운데서 도움의 손길이 전혀 없어 스노클링을 시도조차 못했던 것과 달리, 와얀 덕에 멘장안(Menjangan) 섬에서는 바닷속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진작가님은 두 초보를 본인이 맡을 테니, 능숙한 사람들을 데리고 먼바다를 구경시켜 주라고 와얀에게 청했다. 진정한 프로 가이드 와얀은 초보자들을 버리지 않았다. 튜브에 둘을 내내 달고 다니며 나머지 사람들 역시 부족함 없이 컨트롤했다. 덕분에 나 같은 초보도 먼 데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싶어 휘휘 둘러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와얀이 이름을 부르며 적당히 길을 안내하더라고, 여간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며 동행들도 칭찬했다. 그 어떤 물쫄보도 와얀이라면 믿고 소개할 수 있겠다. 8월엔 나도 튜브에서 손 떼고, 대신 와얀 곁에 딱 붙어 스노클링 해야지.
마지막 리뷰로는 ‘빵 고문(?)’을 하지 말아 달라 청했다. 매일 차에 인원수만큼 간식을 넣어 주는데 그게 바로 1인 1 빵 상자. 맛있는 거 사 먹으러 다니기도 바쁜 우리에게 빵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친절한 배려에 감사드린다 말하며, 간식은 간단하게 준비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다정도 병이란 말이 어울리려나.
한 사람 한 사람 짚어보니 귀하지 않은 가이드가 없었다.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또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가이드의 소임을 맡고 있는 지라 그들은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기도 하고, 업계의 동반자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이다. 매니저 아리오는 여행이 반복되면 TC 김보리는 굳이 안 와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잠깐 갸우뚱하다가, 당분간은 반드시 오겠노라 선언했다. 그들의 역할과 나의 역할은 분명히 다르니까. ‘니들이 내 친구들의 마음을 알어?’라고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기술과 경력이 해낼 수 없는 나만의 몫이 분명 있음을 넌지시 전달하긴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 계속 인도네시아 가고 싶거든? 넓고 넓은 인도네시아에 더 많은 점을 찍고, 로컬이 알려주는 좋은 곳을 계속 찾아내야지. 그니까 나 못 오게 막지 마~~~~!
인도네시아 어디까지 가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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