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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Aug 24. 2024

유 아 낫 얼론? 유 아 얼론! 이츠 오케이!


가까이 지내는 언니가 어느 날 물었다. 즐겁게 잘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혼자가 되면 이내 우울의 늪에 빠진다고. 잘 때도 유튜브를 켜고 자고, 자다 깨면 다시 켜고, 또 깨면 또 켜는 그런 밤. 혼자인 시간을 견디기 어려운 이런 마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도 괜찮을까, 떨림을 담아 언니가 물었다.       


나는 말했다. 혼자는 여전히 어렵지만 그렇다 해도 그 순간을 다 피해 갈 순 없지 않겠냐고. 어차피 우린 자주 혼자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나이 들수록, 그 시간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테니,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애써야지, 언니.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지. 일상과 습관, 타성으로 가득한 지금, 여기보다는 멀고 조금 낯선 어딘가가 그러기엔 조금은 낫지 않을까. 관심을 돌릴 수 있는 풍경이 있고, 여린 생명이 마음을 끌고, 나 아닌 다른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그 시간이 좀 더 낫지 않을까. 때론 경직됐다 때론 느슨해지기도 할 거야. 좋은 것을 봐도, 어려움에 처해도 우린 그 순간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겠지. 때론 불안하고 때론 안도하며. 혼자여서 좋거나, 혼자여서 쓸쓸하거나. 그런 감정을 오가는 여행의 시간이 조금은 우리를 단련해주지 않을까.’


조용한 소신으로 언니에게 답했다. 언니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등을 안아주고 싶었다. 내 심장도 따스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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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에 단련된 지 조금 오래되었다. 혼자일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충만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자’가 시작된 지점은 매우 분명하다. 울기 위한 자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월요방랑’이라 이름 지었고 월요일 하루만 움직이거나 때때로 일요일에 떠나 월요일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의 모든 방랑은 너를 향한다’고 길 위에 적었다. 혼자여야 말이 되는 여행이었고, 그렇게 혼자에 잘 길이 들었다. 그 덕에 나머지 시간엔 감쪽같이 명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찌질한 나를 유배형에 처했다. 유배라고 쓰고 치유라고 읽어도 좋을 여행. 감성지수는 우량하나 생활지수는 불량하나 사람, 대면지수는 명랑하나 내면지수는 황량하며, 인성지수는 선량하나 비관지수는 치사량인 사람으로 나를 정의했다. 지금도 그 정의는 유효하다. 


공감 과다, 배려 과다의 삶으로부터 나를 고립시키고 싶었다. 남을 배려하는 일은 나를 배제하는 일이었다. 나를 돌보지 않은 나를 벌주고 싶었다. 나를 바라보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선. 자책과 자부, 질타와 칭찬, 벌과 상, 때려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속 터지게 답답하고 속 터지게 짠하다. 내가 나를 유배 보내기. 그다음엔 내가 나를 꼬옥 안아주기.      


제주도에 한 달간 여행 다녀온 사실을 시어머니에게 들킨 날, 어머님은 나에게 XX도 안 달린 게 겁도 없다며 혀를 내두르셨다. 혼자 하는 여행이야 여행작가들에게나 흔하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많은 사람(여자)들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올 때도 많다. 


나도 겁보예요, 나도 쫄보예요, 내가 더 길치예요. 개 무서워요, 물 무서워요, 자빠질까 봐 자전거도 못 타요, 비행기 탈 때마다 유서 쓰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루 천 보 미만 걷던 날도 많아요, 우황청심환을 이따금 먹어요, 부담스러운 약속이 잡히면 여러 번 꿈을 꿔요, 그 어떤 탈 것에서도 잠을 못 자요, 차에서 눈을 감으면 어딘가로 곤두박질칠 것 같아요, 악몽을 자주 꿔요, 타고난 길치라 뷔페식당에 가면 접시에 음식을 담고 난 후 내 자리를 못 찾기도 해요, 노래방에서 화장실에 갈 땐 방 번호를 꼭 외워야 해요, 지금도 종로 한 복판에 세워두면 내 집 가는 쪽 신촌 방향이 어디인지 감을 못 잡아요.... 

얼마나 더 말하리.      


그런데 신기한 건. 막상 혼자 길 위에 서면, 이상하게도 덜 나약해지더라. 신경 쓸 타인이 없으니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작은 것부터 하나씩 극복하려는 용기가 생기더라. 산만하게 흐트러진 일상의 에너지를 한 곳에 모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이 아니면, 여기가 아니면, 혼자가 아니면 끌어 모을 수 없을 에너지가 돋보기가 볕을 모으듯, 내 영혼 어느 한 곳에 찌르르 모여드는 그 느낌. 나 홀로, 나만의 영웅이 되는 순간. 되게 별 거 아닌 게 되게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 왜. 남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나 홀로 되게 기고만장해지면서, 때때로 별의별 생각이 다 움을 튼다. 뭐, 대충 이런 거. 

와. 저기 저 윤슬 좀 봐. 나를 위해 저렇게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네. 어라, 저 푸른 초원 위에서 공중제비라도 해볼까, 나 되게 귀엽겠어, 오호 저 개양귀비는 나를 위해 저렇게 깨방정 춤을 추고 있군, 잉. 바람에 누운 풀이 너무 슬퍼, 하나하나 풀을 다 세워주고 싶다, 너도 나만큼 힘들구나......     


오로지 나에게만 반응하는 시간이 나를 단련한다. 앞에서 말했듯,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도 이래 봬도 엄마라 아들, 딸이랑 맛있는 거 먹으며 웃고 떠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우- 가장 충만한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은 가시나무새’ 같은 사람이었던 나를, 오래 외면하고 살았더랬다. 그때의 나도 나쁘지 않다. 그 덕에 모든 관계가 나긋했다. 그 덕에 지금, 별 다른 여한 없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부작용도 있다. 점점 나에게 예민해진다. 초자아가 강해진다. 남은 나날, 원자아와 자아 그리고 초자아 사이에서 부단히 많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겠지. 벼린 칼처럼 예리해지더라도, 나는 나를 주목하며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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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가 길었다. 사실은 (8월 22일 밤의) 주사다. 그러나 맑은 정신에도 같은 생각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결국 혼자다. 감사하게도 우린 결국 혼자다. 태초에 우리는 엄마의 자궁 속에서 혼자였고, 종내에 우리는 관 속에서 혼자일 테니, 지금 혼자에 익숙해져도 그저 괜찮다. 혼자여도 괜찮다면, 혼자가 초콤 더 좋다면, 아마도 그게 진짜 어른. 나 지금 혼잔데, 너무 편해. 언니도 언젠간 혼자 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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