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애

공감의 깊이

by 강점코치 모니카

국제결혼의 특성상 비자문제를 해결했어야 했기에 우리 부부는 내가 26살 때 결혼했다. 일찍 결혼한 터라 둘이서 실컷 놀고, 7년이 지나 내가 32살 되던 해 첫 아이를 낳았다. 나보다 남편이 4살이 많기에 그 7년 동안 남편의 사촌과 친구들 대부분이 첫 출산을 경험하는 것을 지켜봤다. 솔직히 당시에는 그들에게 첫 아이의 탄생이 어떤 의미일지, 그들의 인생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 이벤트 정도로 여기며 출산 소식이 들려오면 영혼 없이 선물과 축하카드를 보내곤 했다.


심지어 우리 부부만 아이가 없을 때는 아이가 있는 부부와 저녁식사 자리를 갖거나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아기를 챙기느라 늘 정신이 없는 아기 엄마는 테이블을 몇 번씩 이탈하게 되어 대화의 흐름을 끊기 일쑤였고 여행지에서도 아이의 루틴을 깨면 안 된다며 저녁을 5시 30분에 먹자고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여자친구들끼리 만날 때도 아이를 데리고 온다는 친구가 있으면 은근히 짜증이 올라왔다. 아이 때문에 정신없어질 분위기가 상상되어 나가기 싫어졌다.


남편이 36세, 내가 32세 때 우리도 부모가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어 새벽에 병원으로 출발하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집에 다시 올 때는 둘이 아니라 셋이 돼서 돌아오는 거야."


둘이 셋이 되는 사건은 결혼을 통해 남친이 남편으로 변하고, 여친이 아내로 변하는 경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 부부의 인생과 일상을 통째로 바꾸어놓는 큰 사건이었다.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어떤 의사결정보다도 책임의 무게가 무겁고 버겁게도 느껴졌지만, 동시에 아이의 존재는 우리 부부를 마침내 가족으로 완성시켜 준 것 같은 충만감과 결속감을 주었다.


이 엄청난 경험을 이미 겪은 터라 남편의 사촌과 친구들은 우리 부부의 출산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이것저것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몇 년 전 그들이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 내가 으레 가식적으로 영혼 없이 응대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건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와 함께 식사자리를 가지거나 여행을 가도 그 자리를 아무 문제 없이 다 같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 저 집 아이들이 온갖 난장을 부려도 부모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질서 와중에 질서를 이루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엄마의 보호자로서 암 진단부터 치료까지 엄마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왔다. 하지만 내 세포가 암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수술실에서 내 살갗이 찢어지는 것은 아니다보니, 보호자인 내가 환자 당사자의 고통과 마음을 오롯이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동일한 병과 싸우며 병원에서 만나게 되는 환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엄마가 처음 입원해서 폐에 찬 물을 빼며 온갖 검사를 받고 있을 때 엄마의 바로 옆 침대에 80대 할머니도 엄마랑 똑같은 흉수 배액관을 가슴에 매달고 입원해 계셨다. 우리 외할머니보다 1살이 많은 서대문 할머니를 엄마는 '형님'이라고 불렀고, 서대문 할머니는 엄마를 '아우님'라고 불렀다. 두 분은 서로 짠 듯이, 한 사람이 뼈스캔 검사를 다녀오면 다음 분이 뼈스캔 검사를 다녀오고, 한 사람이 심장초음파 검사를 다녀오면 다음 분이 심장초음파를 다녀오며 동일한 검사를 받았고, 2주 후 똑같이 늑막전이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말하자면 두 분은 '진단 동기'이다.


진단동기인 만큼 항암주기도 두 분이 비슷해서 엄마가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서울에 올라올 때면 병원에서 항상 서대문 할머니를 마주치게 되었다. 항암치료 일정이 엇갈린 때는 미리 전화로 시간을 맞추어 꼭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는데 서대문 할머니는 엄마를 볼 때마다 10만 원이 담긴 봉투를 건네신다. 당신이 점심을 사주고 싶은데 주사를 맞느라 나가질 못하니, 집 가는 길에 딸내미랑 같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는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이렇게 돈을 주시면 어쩌냐고 내가 따져 물으면 늘 똑같이 대답하신다.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 너희 엄마 얼굴을 보면 내가 힘이 나서 그래.'


서대문 할머니는 엄마에게 포항에 내려가지 말고 할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치료를 받으라고도 하셨다.


'할머니, 서울에 멀쩡하게 딸네집이 있는데 울 엄마가 왜 할매집에서 살아요?'


내가 빵 터져서 물었더니 서대문 할머니는 본인 마음이 그렇다고 하신다. 엄밀히 따지면 두 분이 서로 안지가 이제 겨우 6개월인데 서대문 할머니가 본인의 자식보다 우리 엄마에게 더 의지를 하니 서대문 할머니의 아드님과 며느님도 이 상황을 고마워하면서도 의아해하신다. 나는 매번 우리 엄마가 봉투를 받게 되니 아드님과 며느님 보기가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두 분이 전쟁터에서 만난 전우라서 그래요. 목숨 걸고 최전방에서 싸우고 계신데 아무래도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시겠죠. 저희는 자식이라도 한 발짝 뒤에 있잖아요.'


내 말에 서대문 할머니의 아드님과 며느님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폐암 환우와 가족이 모여 정보를 나누는 네이버 카페가 있다. 나도 엄마가 처음 진단을 받을 무렵 아무것도 모르고 불안감만 치솟던 시기에 이 카페에서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카페에는 10년 넘게 폐암 치료를 받으며 생존해 계신 환우와 가족들도 있고 각자의 치료 및 간병 경험을 진솔하게 나눈 글들이 가득하다.


최근에 올라온 글 중 우리 병원에 대해 문의하는 글이 있었다. 환우는 70대 초반 여성분이셨는데 우리 엄마가 진단받았을 때와 굉장히 비슷한 양상이어서 댓글을 달아드려야지 생각하며 읽었는데 글쓴이의 아이디가 '육지며느리'였다. 세상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이렇게 밤잠 설쳐가며 애쓴다고? 이 효부는 내가 무조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자세하게 답글을 달았고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부담 없이 채팅을 달라고도 덧붙였다.


예상했던 대로 환우분은 제주도에 사시는 시어머님이었고 보호자는 서울에 사는 육지며느리였다. 13년 전에 암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면서 6개월 동안 고생만 하다가 떠난 남편을 기억하고 있는 제주도 시어머님은 폐암 소견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치료를 거부하고 제주도로 내려가길 주장하셨다. 육지며느리는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신약이 많고 항암치료가 예전과 다르다고 시어머님을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육지며느리는 나와 소통해서 우리 엄마가 항암치료 차 입원하는 날에 병원에서 두 분의 만남을 주선했다. 숱이 빽빽한 머리카락과 여장부 같이 기개 넘치는 우리 엄마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난 뒤에 제주도 시어머님은 항암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셨다. 항암치료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이 있었는데 '포항 이모'를 보고 나니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 엄마는 '포항 이모'가 되었고 제주도 시어머님은 '제주도 이모'가 되었고 육지며느리와 나는 서로에게 언니와 동생이 되었다.


제주도 이모가 조직검사 결과 및 최종 치료 방향을 듣던 날, 마침 우리 엄마가 바로 앞 타임에 진료를 보았다. 진료가 끝난 뒤에도 엄마와 나는 대기실에서 제주도 이모 가족을 기다렸다. 제주도 이모는 다행히 경구용 표적치료제 복용이 가능한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어서 다음날부터 알약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폐암 4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치료가 경구용 표적치료제 방법이다. 3개월에 1번 병원을 방문해 약을 처방받아 혈압약이나 당뇨약을 복용하듯 매일 약을 먹으며 치료를 하는 것이다. 표적치료제도 항암제이니 당연히 각종 부작용이 있고 언젠가 내성이 생기지만 치료의 편의성이 주사치료에 비해 월등하다. 또한, 표적치료제에 내성이 생기고 나면 그때 주사항암치료로 넘어가는 수순이기 때문에, 표적치료제 복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쓸 수 있는 치료 방법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수명의 연장을 뜻한다. 바로 주사치료를 시작한 우리 엄마보다 제주도 이모는 표적치료제 내성이 생기기 전까지 최소 1년은 안정기 기간을 확보한 셈이다.


'제주도 이모! 너무 잘되었네요! 이모가 폐암 4기 중에는 제일 행운아인 거예요. 알약을 먹으니 얼마나 좋아요! 정말 축하드려요.'


방금 공식적으로 폐암 4기를 진단받은 환자에게 축하라니 적절치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미 생긴 암은 어쩔 수 없고 치료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이 가능하다고 하니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다. 제주도 이모와 아들 내외와 우리 엄마와 나는 그렇게 진료실 앞에서 같이 엉엉 울었다. 나는 우리 엄마 폐암 때문에 운 적은 없는데 남의 엄마 폐암 때문에 눈물이 났다. 환자들은 환자들대로 당사자들의 아픔을 공감했고 보호자들은 보호자들대로 그들의 힘듦을 위로했다.


엄마의 소위 '인싸' 기질은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기에 엄마의 병원 친구 리스트에는 '당진 아저씨'도 있다. 당진 아저씨는 엄마보다 1년 전에 발병하여 1차 치료를 완료했었는데 재발로 인해 재입원했을 때 우리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당진 아저씨와 아줌마와도 6개월 동안 꾸준히 연락하며 식사도 두 차례 함께 했다. '당진 아저씨'는 항상 나를 '딸내미'라고 부르며 커피도 사주시고 밥도 사주신다. '당진 아저씨'는 이미 항암주사약을 여러 개 바꾸었는데도 암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모두가 걱정 중이다.


엄마를 중심으로 9층 병동 폐암 환자들이 이룬 연대는 환우들에게 그들이 어디에서도 얻지 못하는 공감과 위로를 선물한다. 병동 간호사들까지도 우리 엄마를 '9층 1 병동 테토녀' 라고 부르며 특유의 '인싸력'에 감탄한다. 나는 엄마의 극도의 외향성과 오지랖을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느낄 때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또 엄마 자신도 이 연대를 통해 힘을 얻으니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또, 우리가 작게나마 남을 도우면 그게 복이 되어 돌아와 우리 엄마를 더 오래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엄마는 폐암이라는 '주적' 과 4기 최전방에서 싸우면서도 자신이 타인에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 자기 존재의 쓰임을 확인하며 아직은 더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것 같다. 전우애는 여러 방식으로 엄마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아준다.


오랜 전에는 엄마와 한 몸이었던, 엄마가 뱃속에 품어 낳은 자식이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병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에 엄마를 오롯이 이해하거나 깊이 공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내가 출산과 육아를 거치고 나서야 먼저 부모가 된 친구들의 입장을 오롯이 알아차렸던 것 처럼 말이다. 보호자로서 역할의 무겁게 느껴질 때는 나 자신이 암 환자가 되지 않는 이상 입안의 혀처럼 엄마를 돌볼 수 없음을 상기하고 '어쩔 수 없는 게 있어!' 라고 시원하게 인정해버리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서대문 할머니', '당진 아저씨', '제주도 이모'와 같은 전우들이 자식도 못 주는 것을 엄마에게 주고 있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한 가지 두려움은 전방의 전사들 중 어느 하나가 먼저 떠난다면 그 여파를 나머지 전우들이 어떻게 감당할까, 딱 그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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