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을 지키기 위해 쓰는 기록들
MBTI.
한동안 유행했던 성격검사.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때로는 사람을 규격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그런데 사람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한 관심은, 그 검사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갑내기 사촌과 중·고등학교 시절을 같이 보냈다. 사촌은 소위 말하는 ‘일진’이었다. ‘일진’과 ‘모범생’.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면서도,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했던 두 사람. 그녀는 자신의 비행을 감추기 위해 나에게 종종거짓말을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지냈던 학창 시절의 일부는 지금도 어쩐지, 어둑한 그림자로 남아있다.
사촌의 오랜 그림자에서 벗어났던 대학교 1학년 시절, 그때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MBTI 검사였다. 그때의 결과는 ‘ESTJ’였다. 안정된 질서 속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그때, 상담 선생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상황에 따라 제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요. 사람은 그 모습이 일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사람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져야지, 늘 같으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그 말은 불안정했던 나를 위한 위로라 여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건 ‘유연함’이라는 단어의 다른 표현이 아니었을까.
최근에 MBTI 검사를 다시 하니, 유형들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혼자 있을 때 내면의 질서를 세우고,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영감을 받는다. 현실적으로 사고하지만,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누군가의 감정에 깊이 흔들린다. 함께하는 일에는 계획적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는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
이렇게 경계에 서 있다는 건, 때로는 존재감이 옅어지는 일과 닮았다.
선생님에게 물었다.
“저는 제가 ‘ESTJ’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ESTJ는 세상이 별향님에게 기대했던 모습이 투영된 결과일 수도 있어요. 지금의 별향님은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다루는 섬세한 균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죠.”라고 하셨다.
요즘 나는 나의 속도가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음을 느낀다. MBTI의 변화는 단순히 성향이 바뀐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삶의 중심축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누군가가 세워둔 기준 안에서 살고자 했다면, 이제는 그 기준이 내 안으로 옮겨와,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다. 여백과 느림이 그 안의 숨을 지켜줄 테니까.
그래서 요즘의 나를 한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 유형의 틀 밖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