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C(Context-Performance-Challenge) 모델 활용
해외 시장, 특히 개도국을 분석할 때는 그 나라가 처한 변하지 않는 환경인 맥락(Context), 그 위에서 이루어낸 성과(Performance),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도전과제(Challenge)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CPC 기법'이 유효합니다.
저는 오늘 이 프레임워크를 통해 제가 4년여간 몸담았던 르완다 농업 현장을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르완다 농업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이 처한 조건들을 직시해야 합니다.
르완다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으로, 물류비가 구조적으로 비쌀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국토 대부분은 가파른 산악 지형이며, 인구 밀도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높습니다. 이로 인해 농민의 72.3%가 1헥타르(약 3,000평) 미만의 작은 땅을 경작하고 있어, '규모의 경제' 실현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입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르완다는 지난 10년간 연평균 8%라는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기록했으며, 작년에는 무려 8.2%의 성장률을 달성했습니다. 제노사이드의 폐허 위에서 이룬 이 성과는 분명 기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국가 전체가 고속 성장하는 동안, 국가 고용의 70% 이상을 책임지는 농업 부문은 단 1.7% 성장에 그쳤습니다.
농업은 GDP의 25%를 차지하지만, 빈곤 인구의 80%가 농민이라는 통계는 국가 성장의 과실이 농촌으로 흘러들지 않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으며, 전체 가구의 31%는 여전히 '지속적 빈곤'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르완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자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했습니다. 국가 주요 도로망의 80%를 포장했고,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7만 헥타르가 넘는 관개 시설을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과 뒤에는 거대한 역설이 존재합니다.
첫째,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관개 시설의 혜택을 받는 농민은 고작 9%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0%는 여전히 비가 오기만을 바라며 불안정한 강우에 의존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도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요 간선도로는 잘 닦였지만, 정작 농산물이 나오는 마을 길은 여전히 흙길입니다. 국토의 90%가 경사지인 탓에, 비포장도로는 우기 때마다 유실되어 물류를 단절시킵니다.
둘째,
르완다 농업의 진짜 문제는 생산보다 그 이후에 있습니다. 수확 후 농산물을 신선하게 유지할 콜드체인(냉장 유통)이 전무하여, 신선 농산물 분야에서만 매년 2천만 달러(약 27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합니다. 이는 농민의 땀방울이 유통 과정에서 증발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엔진(정부 계획)은 있지만, 굴러갈 바퀴(유통망)가 없는 격"이라는 전문가의 지적은 뼈아픕니다.
셋째,
분절된 소농 구조는 농민들을 시장의 약자로 만듭니다. 저장 시설이 없는 농민들은 수확한 작물이 썩기 전에 팔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반면, 운송 수단과 자본을 쥔 중간상인들은 이 점을 이용해 가격을 결정합니다. 개별 농민은 물량이 적어 독자적인 시장 진출이 불가능하기에, 중간상인이 제시하는 헐값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농업에서 창출된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은 생산자가 아닌 유통 단계에서 흡수되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넷째,
르완다의 옥수수 수확량은 헥타르당 1.7톤으로 세계 평균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생산성을 높일 개량 종자 사용률은 35%에 그치고, 노동력을 절감할 농기계 사용률은 1%에 불과합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 보급의 문제를 넘어, 농민들의 구매력 부족과 교육 부재가 얽힌 복합적인 과제입니다.
마치며
국가 전체의 고속 성장과 농업 부문의 정체, 잘 닦인 도로와 소외된 마을길, 거대한 관개 시설과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90%의 농민, 매년 사라지는 270억 원의 가치, 그리고 1%에 불과한 농기계 사용률. 이 놀라운 사실들은 르완다의 성공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입니다.
르완다 농업은 불가능에 가까운 여건(Context) 속에서 놀라운 성장(Performance)을 이뤄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다수의 농민과 비효율적인 구조라는 무거운 과제(Challenge)를 안고 있습니다.
이제 르완다의 다음 과제는 단순히 '더 많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가치사슬을 잇고 농민에게 제 몫을 돌려주며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 여정에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과 현명한 접근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