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중독=질병' 논란에서 빠져버린 핵심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게임’이란 뭘까.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디지털·비디오 게임”이란 게 WHO 설명의 전부다. 이러한 정의대로라면 폭력성 때문에 이슬람계 국가에서 금지된 ‘배틀그라운드’도, 미국 중학교에서 부교재로 쓰이는 ‘심시티’도 모두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 스마트폰 게임으로 나온 수학퍼즐 '스도쿠'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긴 한데,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출시된 일본 게임 중 ‘프린세스 메이커 Q'란 게 있었다. 그 유명한 프린세스 메이커의 그림체만 따라한 퀴즈 게임이다. 당시만 해도 내겐 퀴즈 난이도가 극상이었다.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과 같은 국가제도로 알맞은 것은?” 따위의 문제를 연달아 맞혀야 했다.
이딴 게임이지만 딸래미를 프린세스로 만들고 싶어 책을 찾아가며 플레이했다. 책을 보고 있는 시간이 게임화면을 보고 있는 시간보다 길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도의 학습 게임이었다. 덕분에 상식은 많이 늘었다.
프린세스 메이커 Q 같은 게임에 중독된 것도 질병으로 보고 치료책을 찾아야 할까. 이쯤 되면 WHO가 참으로 무책임한 국제기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회원국에 법적 의무를 지울 수 없는 공익단체라지만, 그 상징성을 고려하면 정책을 발표할 때 신중했어야 한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분류한 결정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그럼 최소한 ‘게임’의 뜻 정도는 구체적으로 확립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WHO의 애매모호한 정의는 한국에서 점점 큰 논란을 낳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2016년 말 국내에 “WHO가 성관계 파트너가 없는 사람을 ‘장애인’으로 분류했다”는 기사가 퍼진 적이 있다. 당연히 헛소리다. WHO의 원래 취지는 ‘불임(infertility)’ 대상에 싱글 남녀와 동성애자를 포함시켜 모든 사람에게 ‘번식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부 외신이 불임을 ‘장애(disability)’로 해석해 참사를 낳았다. 국내 언론이 이를 무분별하게 베껴 쓴 것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살펴보지 않은 국내외 언론은 당연히 문제다. 하지만 용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지 않은 WHO에게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하기 힘들다. WHO도 뜨끔했는지 “우리는 불임을 장애로 분류한 적이 없음을 다시 한 번 알린다”고 트윗을 날렸다. 정의(正義)를 위해 정의(定義)가 중요하다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