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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Oct 01. 2020

내 마음은 몇 평일까요?

나팔꽃에 배우는 번아웃 예방법



평소 브런치에 '관계'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글쓴이에 몰입을 하곤 한다.     

'에고. 속상했겠다. 친구하고 절연했으니'     

'이런.  연락해도 안 받는 친구라니. 그런 친구 하고는 인연을 끊기 잘했어요. 작가님아'     

이렇게 혼잣말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난 피해자 편에 서서 위로와 공감만 나누면 된다고 생각하고 라이킷도 했다.     

그날 오후쯤 집안 정리를 하고 손을 씻는데, 갑자기 뒷목이 서늘하다.     

고장 난 듯 버벅거리는 장면이 눈에 스친다. 소파에 앉아 생각을 파고들었다.      

         

내가 가해자였다니!          


마흔 초반 즈음 이 사람을 만나도 시큰등, 저 사람을 만나도 시무룩하던 때가 있었다.     

어차피 만나봐야 서로 진정한 공감도 나눌 수 없다고 결론짓고 관계에 회의적이던 시절, 톡에 뜨는 빨간불이 반갑지 않던 시절이다. (브런치 파란불은 사랑한다 ㅎ 파란색은 왠지 직진해야 할 것 같고 빨간색은 멈춰야 할 것 같은 이 단순한 생각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톡을 누르지 않고 화면을 스윽 보니 네 명이 모이는 친구 모임 약속 잡는 톡이었다. 뭐라고 핑계 대고 한 번은 거르고 싶었다. 30년 가까이 된 친구니까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단지 서로의 속사정을 다 알기 때문에 딱히 핑곗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번에 나가기 싫어 여러 궁리를 해봤다.     

'아프다고 해? 안 아프잖아. 그러다 진짜 아프면 어떡하려고? '     

'바쁘다고 해? 너 바쁜 일 없는 거 네 친구들 다 알아.'     

' 집안에 사정? 뭐라고 할 건데? 괜히 말 지어냈다 나중에 들통나면 얼마나 우스운데.'     

결국은 한참 뒤 톡을 읽고, 그 사이 정해진 시간, 장소로 나가겠다고 ㅇㅋ만 찍어 보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아침은 머리가 둔탁하다. 미간에 세로줄이 생기고 왠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파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찌뿌둥한 표정으로 나가 심통 맞게 앉아있었다. 3년 전부터 거슬리기 시작한 친구의 말투가 쌓이고 쌓였던 참이었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이 들수록 추측과 단정을 오가며 자신만의 드라마를 쓰는 친구. 그 친구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내용이 각색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한마디 던진다.     

" 아무도!! 넌 왜 이리 기분이 안 좋아? 왜? 큰애 성적 떨어졌나 보구나? 괜찮아. 잘하던 애니까 어느 대학이든 가겠지 뭐. 요즘 재수도 많이들 하잖아? 대학 까짓 거 또 못 가면 어떠냐? 넌 왜 만날 그런 거 가지고 울상이야? 인생이 그게 다가 아니야."     

'햐...' 그때 한마디 했어야 했는데 수돗물에 담가놓은 조개처럼 내 입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소금! 소금!)     

늘 말하지만 난 착해서가 아니라 순발력 부족으로 멍하고 입을 닫고 나왔다.     

뇌가 손가락 끝에 달여있다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나는 글로 쓸 때보다 말로 할 때 훨씬 더 버퍼링이 오래 걸리는 타입일 뿐이다. 그 버퍼링이 풀리고 LTE급 인터넷이 터지기 시작하는 건 꼭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을 때부터다.     

'으악..... 그때 한마디 쏘아붙였어야지. 이 바보야' '우리 애 성적은 안 떨어졌고 니 말투가 정말 참기 어렵다고!'

일상이 늘 추측, 비관적 확대로 이어가다 마지막에 가서 쏘 쿨하게 결론짓는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난 기운이 쪽 빠져버리곤 했다. 걱정을 위장한 저주 같은, 묘하게 경계선을 넘나드는 친구의 화법이 거슬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불쾌함은 꽤 오래 스며들었다.

결국 그날 이후로 난 그 친구와의 모임을 피했다. 핑계를 돌려 막기로 대며 최대한 모임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우린 멀어졌다.     

지금까지는 내가 친구한테 섭섭했던 것만 생각하고 내가 피해자라고 여겼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친구는 자신이 한 말은 잊고, 내가 연락을 미루며 만남을 지연시켜서 인연이 끊겼다고 생각할 것이란 것을. 다시 생각해봐도 표면적으로 이 상황을 정리해보면 관계를 끊은 것은 분명 내쪽이었다. 사실 그깟 몇 마디 그냥 넘겨주지 못하고 관계를 끊은 건 나다. 결국 나는 가해자였던 것이다.                                                       





나팔꽃은 나팔 모양으로 7~8월에 피는데, 아침 일찍 피었다가 점심때가 지나면 서서히 오므라든다. 줄기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덩굴의 성질이 있으며, 2m 이상이나 길게 벋는다. 나팔꽃의 줄기에는 잔털이 있어서 받침대를 감아 올라갈 때 미끄러지지 않게 되어 있다.
약한 줄기는 다른 물체를 휘감고 자라는 속성이 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나팔꽃에 번 아웃 예방법을 배우다        


나팔꽃은 흔히 자동차 도로 위 화단에 많이 피어있다. 너무 흔하게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는 꽃 중 하나다. 나팔꽃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팔꽃의 자기 관리 능력에 감탄했다. 

7.8월 한여름에 피는 나팔꽃이 아침 일찍 피었다가 뜨거운 한낮에 꽃잎을 오므린다는 사실은 너무나 신선했다. 나팔꽃이 7.8월 한낮 강렬한 햇볕에도 내내 피어있었다면 아마 금세 지쳤을 것이다.

     

몇 년 전 스페인 여행 갔을 때, 시에스타라고 문을 걸어 잠갔던 상점 안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났다.  

처음 그 광경을 보고는 '세상에 한창 장사할 때, 무슨 낮잠 자는 시간? 생후 6개월 아가인가? 저동안 왔다가는 손님들로 보는 손해는 어쩌려고?' 이렇게 나만의 잣대로 쉽게 비난하는 우를 범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학생의 몸과 마음속 깊이 심어놓은  '노력'과 '성실'에 대한 찬양. 별책부록으로 딸려 나오는 인내의 아름다움에 깊이 세뇌된 나였다. 그 노력, 성실, 인내에는  '인생의 최대 덕목이라는 왕관'이 씌워 있었다.  쉬고 있으면 뭔가 찜찜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려는 것도 그 세뇌 작용의 여파였다.


노력과 성실. 인내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쉼 없이 돌아가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내 능력 이상의 여러 가지 역할과 의무가 휘몰아치던 때를 노력, 성실 그리고 인내를 잡고 버티며 지나왔다. 그리고 난 번아웃 상태를 겪게 됐다. 화병과 함께.

 

그 무섭다는 번아웃을 경험해서였나 보다.  번아웃이 오기 전 미리 자기 조절을 잘하는,  나팔꽃의 처세술도, 스페인 사람들의 태도도 현명해 보였다. 그들은  '노력' '성실' '인내'의 자세를 유지하려면 적절한 '쉼'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인내의 '쉼'까지도.

             




사람에게 '지친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어쩌면 지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내 목표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엔 지칠 정도로 몰아붙일 때는 '내가 먼저인지, 내 목표가 먼저인지'에서 늘 목표가 앞서 나갈 때였다. 

그렇게 달리고 나면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이 닳아 없어진 느낌이었다.  

     

신체적, 정신적 번아웃만이 번아웃은 아니다. 역할 수행의 번아웃도 있다.

큰아이 때 학부모로서 너무 열정적이었던 난, 학부모 역할에도 지쳤다.

지금 작은 아이가 고등학생인데 노트북을 켤 때마다 브런치만 보고 있다.   

아이 입시 카페에 가지 않은지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학원 설명회도 안 간다.

  

관계의 번아웃도 마찬가지다.     

관계에 있어서도 나보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를 더 의식했을 때 관계의 번아웃이 왔다.     

내가 친구와의 관계를 끊은 것도 나보다 '친구가 보는 나'에 더 매몰돼 너무 오랫동안 참았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의 평수는 5평인데 난 멋있어 보이려고 51평짜리 아파트 인척 하고 살았다.     

그 결과 5평과 51평의 아파트 차액만큼 인내심을 대출받아야 했고 인내심 대출을 받다 받다 파산해버렸던 것이다.   

때로는 친구한테 "아까 그 말을 듣고 맘이 좀 안 좋네" "응?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잘못 안 것 같아." "다음부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했어야 했다.  그렇게 내 인내심을 다시 채워 넣는 행위로 나를 보호했어야 했다. 나를 보호했다면 관계의 번아웃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팔꽃이 꽃잎을 대낮에 오므리듯이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식물의 생체 시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침 일찍 피는 나팔꽃, 나방을 유인하기 위해 밤에 피는 달맞이꽃 등 식물은
시계가 따로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꽃을 피운다. 18세기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는 이를 이용해 꽃 피는 시간을 기준으로 '꽃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꽃들이 각각 다른 시간에 꽃을 피우는 것은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다. 최근에서야 개화(開花) 시간의 비밀이 유전자 수준에서 밝혀지고 있다.                   
 출처:  조선일보 "식물에도 생체시계가… 나팔꽃은 아침, 분꽃은 오후에 활짝"
 김상규 IBS연구위원

                                       

식물은 연약하다.  수동적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나팔꽃처럼 꽃이 피는 시간을 제한하기도 하고, 여린 가지로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물체를 휘감고 자라기도 한다. 게다가 잔털까지 있어서 휘감고 올라갈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다. 

자신만의 생체시계를 만들어 가장 최적화된 환경에서 자신이 살아가게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내는 식물을 보고 나 자신을 반성한다.

그동안 '보이는 나'와 '나의 목표' '역할 내의 나'에 갇혀, 

인내심을 대출해 쓰고 살았다.

그 결과는 결국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았다.

내 인내심의 생체시계를 만드는 것, 살아가면서 필요한 과정인 듯하다.






<낮에 꽃잎을 오므린 나팔꽃 사진 출처: 픽사 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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