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은 재활용품을 버리는 날이다. 현관으로 옮긴 재활용품들을 들고나갔다. 경비실 앞에 분리돼 있는 함에 차례로 넣고 돌아섰다. 한 걸음 한걸음 우리 아파트 동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뭔가 기운이 달랐다. 그야말로 싱그러운 느낌. 두 손 가득 들었던 재활용품함이 비워져서일까.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코끝엔 싱그러운 내음이 닿아 간지러웠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몇 달 전까지 가득했던 벚꽃도 자취를 감추고 며칠 전까지 퍼져있던 철쭉꽃도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들 대신 아파트 정원은 온통 푸르게 푸르게 녹색만으로 채색돼 있었다.
마치 흑백사진과 칼라사진 사이에 녹색사진이 있는 것처럼, 다른 색은 침범하지 않고 오로지 녹색이었다
아파트 마당에서 아파트 내 놀이터 가는 샛길
응? 꽃이 지고 나니 공기가 더 청량하네?
'후후~~ 흡"
숨을 내쉬고 다시 깊게 들이마신다. 갑자기 튀어나온 요가 자세로 릴랙스 해 본다(오해 마시길. 서서 하는 자세다). 마스크의 빈틈으로 청량함이 전해진다. 머리도 맑아지고 가슴 구석에 끼어 있던 미세먼지도 나오는 것 같다. 마실 수록 나를 가볍게 날아오르게 하는 기운이다. 집에 들어가려다 못내 아쉬워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았다.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으니 내가 마치 어제 새로 이사 온 주민 같아 웃음이 난다. 오랫동안 살았지만 지금 아파트 정원은 새로운 모습이다. 익숙한 사람의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이 설렌 날처럼 말이다.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하다가 아까 그 공기 내음이 생각나서 검색을 해봤다. 식물의 호흡에 대해 찾아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있었다.
식물 잎이 광합성을 할 때는 산소를 내뿜지만 호흡을 할 때는 식물 역시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라고 한다. 그래서 숲을 산책할 때는 광합성을 하지 않는 밤보다는 낮에 하는 것이 좋다고. 반면 잎 없이 꽃만 있는 경우엔 광합성을 하지 않고 호흡만 하기 때문에 낮에도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고 한다. 병문안을 갈 때 꽃을 들고 가는 것은 여러 사람이 쓰는 병실에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사람 하나를 보태는 꼴, 공기가 탁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출처:<묻고 답하는 과학 톡톡 카페 1 : 지구과학·생물, 2011. 9. 30., 서울과학교사모임>
여기서 난 몇 달 전, 몇 주 전과 달리 아파트 정원 공기가 싱그럽고 상쾌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꽃은 산소를 발생하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것이다. 보기에는 예뻐도 사람과 비슷한 호흡을 하는 꽃에 비해, 잎은 낮 동안에는 산소를 내뿜으로써 맑은 공기를 전해준다.
사람도 잎이 가득한 식물 같은 사람이 있다. 직업, 나이, 성별과 관계없이 같이 있으면 공기가 달라지는 사람이다. 모임에 그 사람 한 명만 들어와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햇빛을 받아 산소를 뿜어내는구나!
수십 년 전, 직장 동료와 점심식사 뒤 걷고 있었다. 동료는 뜬금없이,
"날이 정말 예쁘지 않아요?. 우리 사진 찍어요."
"네? 사진기가 없잖아요 (23년 전, 휴대전화엔 사진 촬영 기능이 없었다)"
"잠깐만요"
동료는 근처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가게에서 나오면서 즉석카메라를 쥔 손을 위로 들어 보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아이 같았다. 뒤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몇 가닥이 햇살에 비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우리 네 명은 벚꽃이 가득한 길에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단조로웠던 일상이 소풍날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나니 동료가 친구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이 예쁘게 잘 나왔어요."
며칠 뒤 인화된 사진을 건네주는 동료의 얼굴에는 또다시 아이 모습이 배어 있었다. 사진을 보며 한바탕 웃고 나니 왠지 그 시간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 동료와 이야기하다 보면 무겁게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가 견딜만하게 느껴졌다. 분명 난 '어떻게 그럴 수 있지?'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옮겨지곤 했다. 날아갈 듯 상쾌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그 동료와 함께 했던 순간은 소멸되지 않고 기억창고에 저장돼 있다. 산소를 내뿜으며 내 머리와 마음을 맑게 해 주고 순간을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 직장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직장을 관뒀지만 그 봄날 한 순간을 소중히 남겨 준 나무 같은 사람이다.
내 기억 속에는 이런 사람이 몇 명 있다. 그들은 어떻게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낼까?
그래! 세상과의 순환을 이루고 있었어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들은 자신만의 영역을 잘 지켜 내면의 평온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설픈 논리로 자신을 휘두르려는 부당한 힘에 밀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해서 지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과 결과 사이에서 후회와 자기 연민으로 뒤범벅되지 않아서 혼탁해지지 않는다.
대신 의미 깊은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킬 때와 자신이 손을 내밀 때를 분명히 아는 듯했다.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 생활해 나갔다. 촉촉한 피부를 유지하려면 노폐물은 제거하고 수분 함유량은 지켜야 하듯이 자신이 마르고 닳지 않게 잘 관리했다.
게다가 자신 안의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관심 시야를 늘 내 안에서 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길가다 사진기를 사서 찍은 동료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오래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었다고. 자신의 고민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감하고, 동료와의 관계를 풍성하게 하고, 주말에는 봉사활동까지 하며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햇빛을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는 식물처럼, 비를 머금었다가 수분을 보충해주는 식물처럼 늘 '나와 세상의 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내 고민에만 주저앉아 있지 않고 늘 한발 더 나아갔다.
나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되면 공기가 순환하지 못한다. 며칠째 창문조차 열지 않은 실내 공기 같이 쾌쾌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산소가 아닌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난 꽃인가?' 싶기도 하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꽃).
나는 나와 아이 생각으로 늘 머리가 꽉 차있다 (잘못을 인식하고 노력 중인데 쉽지 않다). 늘 내 안의 문제를 파고 또 판다. 거의 굴삭기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굴삭기를 동원해 문제를 파헤쳐도 문제가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 애초에 인생의 문제는 제거하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나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놓은 사람을 만나면 환기가 잘 되는 느낌이다. 햇빛은 받아들이고 산소는 내뿜으며 순환을 이루고 있어 상쾌하다.
나에 매몰됐던 시각을 세상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해야지
그들은 나 자신과 세상 사이의 벽을 낮추고 순환을 최대화한다. 나 자신에서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삶을, 세상을 건강하게 지탱할 자양분을 생산한다(여기서 자양분은 경제적 '생산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꾸려나가는 자양분을 뜻한다). 때로는 자양분이 봉사나 기부, 사회사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사랑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내 고민, 내 아이 성적 고민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웅크리고 있다가 문득 그 동료가 생각났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간다.
내 안의 문을 열고 나가서 걸으며 햇빛을 받고 광합성을 하려고 한다. 나 자신에 매몰됐던 시각을 밖으로 돌리려고 한다. 이제는 산소를 마시지만 말고 뿜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