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도 Jun 18. 2021

비 오는 날이면 강에 갑니다

잠시, 역할을 벗고 나로 돌아가는 시간


직장을 관둔 지 얼마 안 됐을 때 작은 아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저녁 7시.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하루를 시작한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하루를 채웠구나가 아닌 하루를 써버렸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 몸은 힘든데 내 마음이 몸의 고됨을 애써 외면하더라고요


'난 다른 엄마들보다 모성애가 부족한 건 아닐까?'

'왜 아이와 보내는 시간만으로 충만감을 느낄 수 없지?'

이런 마음을 아이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깊이 넣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 몰래 꺼내 고민하곤 했어요


비 오는 어느 날, 창가에 서서 차를 마시며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린 나무는 젖어들었습니다

비를 빨아들인 땅색은 짙어졌고요


비가 땅과 나무에 내리면 비는 사라집니다

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스르륵 스며들어가죠

비가 나무에 닿으면 나무가 마실 물이 되고

비가 땅에 내리면 땅 피부를 촉촉하게 합니다


비가 비의 모습을 벗고 비 역할의 옷을 입으니

나무에, 땅에 스며들어 비는 사라집니다

사라진 빗방울을 보며 중년의 내가 겹쳐집니다


나이 들수록 나는 사라지고 역할이 늘어납니다

아빠들도 나무에 마실물이 되어주어야 하고

엄마들도 마른버짐 핀 땅 피부를 적셔줘야 합니다


하하 네 압니다. 물론 기쁜 일입니다

내 모습이 사라진 대신 나무도 잘 자라고 땅도 갈증을 푸니까요

애써 생각하면 기쁜 일인데 왜 얼굴 표정은 늘 시무룩하니 생기가 사라질까요


그러다가 어느 비 오는 날

비가 내리는 강에 가게 됐습니다


 강에 내린 빗물은 어떨까요


   <물결이 좀 더 일렁이는 비 오는 밤, 지난주 한강>


저 물결 파동 좀 보세요

서둘러 달리느라 보폭이 커진 아이들 걸음처럼 넘실댑니다


맑은 날 가본 강과 다릅니다

맑은 날 강은 햇살을 내뿜으며  흐느적흐느적 흐를 뿐이었습니다

등교시간이 지났는데도 신발을 슬리퍼처럼  끌며 어슬렁어슬렁 학교에 가는 학생 같았거든요


비가 강에 내리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교실을 벗어나 운동장으로 달려 나오는 초등학생들 같습니다


뭐가 저리 신나는 걸까요?


강물을 만난 비는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역할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담아 흐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가에  물결 파동처럼 미소가 번집니다


그 후로 비 오는 날이면 강에 가곤 합니다

비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비 마음입니다


물론 비가 나무에도 땅에도 내려야 한다는 걸  잘 압니다

강에만 내리면 홍수 나겠죠


하지만

강에 내린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래서였나 봐요

역할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강에 내린 비처럼 가슴이 뜁니다

그저 나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나의 역할을 내려놓고

나로...

가끔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글을 쓰는 지금이 내게는 그런 시간입니다





<대문 사진은 Pixabay. 작가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글을 지난주 비 오는 밤에 쓰고 사진을 다운로드해 놨는데 작가 이름을 써 놓는 걸 잊어버렸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휘둘리는 엄마vs 휘어잡는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