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멋쟁이 한제 Apr 11. 2023

비를 맞으며

아줌마의 사치인가, 소녀의 부활인가. 

 비가 촉촉이 내렸다. 아이들은 새 우산을 선물 받은 후 비 오는 날만 기다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가 오는 것을 보더니 뛸 듯이 기뻐한다. 꼭 첫눈을 본 것처럼, 큰 선물을 받아 든 것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니 나도 좋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조금 더 큰 우산으로 사이즈업 하였고, 둘째는 겸사겸사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 우산을 제 몫으로 받았다. 거의 물려 쓰는 것이 당연한 둘째에게 새 물건의 첫 주인이 된 다는 건 그토록 기쁜 일이다. 아이들은 사실 우산을 쓰거나 안 쓰거나 비가 내리는 만큼 옷이 젖는다. 촉촉이 내리면 촉촉이 젖고, 쏟아져 내리면 쫄딱 젖는 것이 비 오는 날 아이들의 모습이다. 아직 우산 쓰는 것이 서툰 데다 비 오는 것이 신나서 첨벙거리고 다니니 당연한 일이다. 비가 와도 노는 것이 좋은 아이들, 나가 놀고 싶으니 비야 비야 오지 마, 다른 날에 다시 오렴 하는 동요도 있는데 아이들이 비 오는 날 신나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동요는 순전 뻥인 것 같다. 


 비 오는 것이 정말 싫었던 때가 있었다. 주로 아가씨일 때 그랬다. 화장을 공들여했는데 빗물에 얼룩이 지면, 머리를 감고 말리고 말았는데 습기에 다시 축 늘어져 버려서 싫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 한 것일까, 화장 좀 번지면 어때서, 머리 좀 흐트러지면 어때서 아주 조금 내리는 비에도 우산을 꺼내 쓰며 소란을 떨었다. 한 방울이라도 맞으면 큰일 날 것처럼. 아이를 낳고 거의 집에 있으니 화장도, 머리도 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요즘은 비 오는 날이 싫지 않다. 주룩주룩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가 아니면 우산도 잘 쓰지 않는다. 조금 젖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차가운 빗물의 느낌이 좋기도 하다. 주로 집에만 있는 사람에게 빗방울 조금 맞는 일이 어쩌면 하나의 조그마한 일탈처럼 상쾌하기도 하다. 그런 것도 일탈이라고 즐거워하는 아줌마가 된 것일까, 다시 소녀가 된 것일까. 여하튼 비 조금 오는 날, 새 우산을 받아 들고 좋아하는 아이들 앞에서 비를 맞으며 우산 없이 걸었다.


 신랑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출퇴근 지옥철을 타야 하는데 비가 오면 옷 젖고, 무겁고, 붐비고, 복잡하고 오래 걸려서 너무너무 싫다고. 당연하지, 얼마나 힘들까. 나야 비 조금 맞아도 집에 와서 툴툴 털고 말리면 끝이지만 그는 아니다. 예전엔, 그러니까 한 십 년 전쯤, 우리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도 당연히 없었을 적에는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했던 그다. 통통통통 거리는 빗소리가 좋다고. 우직하고 참을성이 좋아서 웬만한 불편엔 불평을 하지 않는 그래서 그런지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번거로움, 축축하고 끈적이는 느낌 따위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다니던 그였는데, 이젠 비 예보가 뜨면 출퇴근 걱정에 얼굴에는 짜증이 서린다. 이해한다. 얼마나 힘들지. 


 가장이란 무게와 육아의 일상은 비 오는 날의 감상마저 바꾸어 놓았다. 비 한 방울에 큰일 날 것처럼 머리와 얼굴을 감싸 쥐던 내가 축축이 내리는 비를 그냥 맞고 다니게 될지, 통통 거리는 비 오는 모습과 소리를 좋아하던 그가 이렇게 비라면 학을 떼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절대 내가 아닐 것 같은데, 그게 바로 내가 되어 가는 일.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곳이 바로 육아의 세계인가 보다. 


 비를 맞고 다녀서 앞머리는 뻗치고, 머리는 축 늘어졌으며 얼굴은 뭔 지 모르게 더 번들거리고 칙칙해졌다. 양말과 바짓단이 조금 젖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번거로워 차라리 비를 맞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비를 맞는 상쾌함이 좋았다. 이런 내가 될 줄 정말 몰랐는데, 우산 찾아 호들갑을 떨던 20대의 나에게 전해주고 싶다. 20년쯤 지나면 이 정도 비는 그냥 맞고 다니게 될 거라고, 그리고 비 맞아 조금 흐트러져도 충분히 예쁘니 걱정 말라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랑의 상차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