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멋쟁이 한제 Apr 28. 2023

중간고사를 끝내며

너희, 몇 천 문제 풀었니? 

 중고등학교 중간고사가 한창이다. 이미 진행 중이거나 끝난 곳도 있고 이제 시작인 곳도 있다. 5주 동안 영어학원에서 내신대비 파트 알바를 했다. 담당 선생님들이 계시니 내가 할 일은 중간중간 빈 틈을 메워 주는 것, 선생님이 부족한 시간에 자리를 채워 아이들의 채점을 봐주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보충 선생님. 여덟 살, 여섯 살 꼬마들과 살다가 다 큰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사춘기 아이들은 첫 만남엔 말수가 매우 적었는데 만날수록 수다쟁이가 되었고, 나도 처음에는 사근사근하게 대해주었지만 나중엔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것의 5분의 1 정도의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부리며 아이들과 친해졌다. 이제 헤어질 시간. 시험 결과를 전해 들으며 그간의 노고를 마음으로나마 듬뿍 칭찬한다.



 아이들은 최소 천 문제 이상 푼 것 같다. 문제집 두 권을 풀었고 끝없이 나가는 프린트 물을 학원에서 풀고 숙제로 풀어왔으니, 천 문제, 속도가 빠른 아이들은 이천문제 가까이 풀었을지 모른다. 중학교 내신 문제는 내가 중학생이던 2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한창 일하던 10년 전과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다섯 문장의 선다 중에 서서 to 부정사의 다른 용법을 골라내거나, 같은 부사적 용법 중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하는 문장을 골라내는 것. find 가 목적어만 취하는 3 형식 동사로 쓰였는지 목적어와 목적격 보어를 받는 5 형식 동사를 취하는지 구별하는 문제들. 영어를 잘하고 기초가 탄탄한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내고, 영어를 못 하지 않지만 기초가 조금 부실한 아이들은 엄청난 양의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감을 찾고 답을 찾는다. 안타깝지만 영어를 못 하는 아이들에게는 영포자가 되는 1차 관문이 바로 중학교 내신시험이다. 까다로운 문제는 정말 어렵다. 


 내가 공부하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우리 집은 학원에 보내줄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무조건 자기주도 학습이었다. 문제집도 여러 권이 없었고 학기 초에 구매한 한 권 정도에 물려받은 문제집이 있거나 없거나 했다. 나는 일단 단어와 대화문, 본문 공부를 하고 문제집에 요약된 부분을 공부했다. 그리고는 공부한 부분을 싹 다 외웠다. 중요 표시가 된 부분은 형광펜이 그어진 대로, 작은 글씨까지 스캔 뜨듯 머릿속에 넣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문제집을 연습장에 풀었다. 정답지를 보고 연습장에 푼 문제를 채점했고, 틀린 문제를 다시 한번 보았으며 이해가 안 가면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는 덮어 두었다가 시험 전에 다시 한번 풀었다. 그러면 문제집에 푼 문제들은 거의 다 맞게 된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다른 문제집을 풀거나 잘 모르겠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한 번 더 공부했다. 시험 전 2-3주 전부터 전 과목 공부를 내가 스스로 스케줄을 짜서 공부를 했고,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수학이 조금 어려웠지만 내신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연습문제와 기출문제를 풀 실력은 되었다. 수능 고난도 문제가 조금 골치 아팠을 뿐. 학원도 안 다니는데 공부를 곧 잘하는 아이, 공부만 하는 애도 아니었고 친구들과 놀기도 잘 놀았는데 성적이 잘 나오는 기특한 아이, 그 아이가 나였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렇게 학원도 안 다녀본 아이가 자라서 학원 선생님 일을 하였다.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양의 문제를 수업으로 숙제로 내어 주며 아이들의 고득점을 향해 달린다. 아이들은 최소 몇 백문제를 풀어와 선생님인 나에게 채점을 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정답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채점은 선생님의 몫이다. 나는 정답지를 보고 베낀 적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정답지를 주고 스스로 채점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숙제가 과목별로 너무 많다 보니 정답지를 보고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기도 하고, 스스로 채점을 하면 오히려 오답정리를 잘 못 하기도 하여 선생님께 채점을 받고 틀린 문제를 확인하는 것이다. 수업을 하다 보면 모르는 걸 모른다고 질문하는 학생은 정말 훌륭한 학생이다. 요새 흔히들 말하는 메타인지를 갖춘 아이. 생각보다 많이 없다. 틀린 것을 고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아이들에게는 틀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뒤처리를 알려준다. 왜 틀렸나 생각하고, 나머지 선다와 비교해 보고, 이게 왜 정답인지를 도출하도록 돕는 것. 이것이 확실하게 된다면 내신 대비 정도는 자기 주도 학습으로도 충분할 텐데, 시험이 다가올수록 피로를 호소하며 졸기도 하고, 이번 문제집 다 맞으면 집에 보내 달라고 조르기도 하는 아이들을 보며 딱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선생님, 문제 푸는 노예 같아요.>라는 말에 <응, 난 채점하는 노예야.>라고 응수하며, 문제 풀며 문제 틀린 덕에 하나 알게 되어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틀린 문제가 나오면 반가워하라고 아이들에게 말인지 막걸렸는지 모를 소리를 하기도 한다. 지금 안 풀었다가 시험에서 틀리면 너무 아깝잖아. 시험 잘 봤을 때 기분 좋을 거 상상하면서 얼른 풀어,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뺀질거리면 숙제로 천 문제 줄 거라는 공갈 협박은 기본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문제를 많이 풀었다. 


 들리는 결과로는 백 점, 95점, 91점. 성적들이 좋은 편이다. 노력한 결과에 아이들과 학부모님,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모두가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은 누구 좋으라고 천 문제씩 풀었을까. 가장 행복한 사람이 학생 본인이길 바란다. 시험 전날 마지막으로 본 아이들의 표정은 처음 만난 날 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십 년 늙어봐야 20대 초중반이지만, 그래도 시험공부의 피로도가 상당한 모양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피곤해도, 하기 싫어도 해 본 경험이 나중에 너희들의 삶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거라고, 그렇게 격려해 주었다. 나를 보고 씩 웃어보이는 아이도 있고, 그냥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을 하는 아이도 있다. 


 최근에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남해이 학생이 떠오른다. 자기주도학습의 끝판왕이었던 아이, 삼촌과 일주일에 치킨데이와 캠핑을 즐기는 입시생, 모범생, 상위권 학생.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공부를 스스로 하고 스스로 채점하고, 모르는 것을 직시하여 질문할 줄 알고 필요한 도움만 받을 수 있는 아이로 키울 수는 없을까. 이렇게 좋은 봄날에 치킨도 먹고, 캠핑과 피크닉을 즐기는 청소년기를 보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날 좋은 봄, 가을, 놀기 좋은 여름, 늘어지고 싶은 겨울에 모두 시험이 있어 아이들은 4계절을 모두 놓치고 살고 있다. 인생의 일부일 뿐이라지만,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시절을 문제 풀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 시스템, 모두가 스카이를 원하고, 대기업을 원하고, 대기업들은 모두 서울에 있으니 서울에 살아야 하고 서울은 좁고, 많은 학생들이 좁은 문을 통과하려 달려가기 때문에 절대평가로 모두 잘하는 아이로 만들기는 이 사회가 뒤집어질 만큼의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 할 것이다. 당장 중학교 시험만 해도 변별력을 갖추려 킬러문항이라고 하는 고난이도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고 그 킬러문항을 잡으려 학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오늘 둘째와 읽은 그림책 슈퍼거북에서는 열심히 사는 거북이가 나온다. 토끼와의 경주에서 한번 이겼더니,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이 되어 도저히 옛날처럼 느리게 살 수 없어 빠르게, 더 빠르게 열심히 훈련하며 사는 거북이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정말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빨라졌는데 거북이는 그러는 동안 천년은 늙어버렸고, 어디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지쳐버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토끼와의 재 대결에서 이번엔 거북이가 지쳐 낮잠을 자게 되고 토끼가 이긴다. 그렇게 경주에서 지고 난 후에 다시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천천히 걸으며 자기 모습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내용이었다. 


 거북이에게서 천문제씩 기출문제를 푸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열심히 푸니 정답률과 문제 푸는 속도가 쑥 올라간다. 성적도 마찬가지, 다만 너무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작 중요한 날에, 중요한 시기에 너무 지쳐 낮잠에 빠지지 않기를. 어른들이 할 일은 경주에서 진 거북이가 다시 낮잠을 자고 천천히 걸으며 제 모습을 찾으려 할 때,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고 안아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번 진 경주가 인생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토끼든 거북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어른들의 몫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운 음식 적응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