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파이가 먹고 싶어 진다. 가을바람과 파이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차가운 바람에 고칼로리 버터가 당기는 것일까, 아니면 따끈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가 함께 생각나는 계절의 서막을 알리는 것일까.
추석 연휴를 맞아 파이 반죽을 했다. 올 해는 따로 전을 부치지 않기로 해서 기름 냄새 대신에 버터 향을 풍겨보기로 한다. 파이 시트의 재료는 밀가루, 버터, 소금물이다. 버터를 스크래퍼로 잘게 부수어 밀가루 코팅이 되게 다진 후에 소금물을 한 컵 붓는다. 반죽이 되는 건지 마는 건지 날가루는 그냥 날리고, 물이 많이 고인 곳은 질척하고, 버터도 아직 덩어리 진 채다. 각기 따로 노는 것이 이게 반죽이 맞나 싶다. 그대로 살살 비닐에 담아 꽁꽁 묶는다. 냉장 휴지의 시간. 냉장고에서 한두 시간 휴식을 거치면 그렇게 따로 놀던 반죽들이 하나로 뭉쳐져 있다. 물이 서서히 스미며 날가루가 없어지고 밀가루 입은 버터와, 버터 묻힌 밀가루가 나란히 어우러져 있다. 버터는 냉장고에 들어가서 다시 차갑게 굳으며 밀가루 속에 녹아들지 않는다. 버터가 녹지 않아야 파이의 결과 크런치를 살릴 수 있다. 하얀 날가루들만 진정을 시켜 밀대로 밀면 파이지가 완성이 된다.
날것 그대로의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트에 다녀온 후 다시 열어보니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밀대로 슥슥 밀어 겹쳐 접기를 하며 파이지를 만든다.
이게 반죽이 될까 싶은 것들이 어울려있는 모습, 어울릴 수 있으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결혼하고 아홉 번의 추석을 보냈다. 아들이 결혼을 하자 시어머니는 안 하시던 명절 음식을 하시기 시작하셨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손자들 먹이시려 음식의 양이 늘어났다. 본인이 다 하신다며 오지 마라, 할 것 없다 하시지만 몸이 힘들고 맘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 먹을 것이 흔한 시대에 왜 냉동고를 명절음식 보관 하는데 써야 하는지 그것이 의문이었던 며느리와 명절 음식은 한 번 할 때 조금 하나 많이 하나 똑같다면서 몇 광주리씩 전을 부치시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건 남편이었고 그렇게 몇 년의 명절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고기를 구워 먹거나 회를 떠다가 한 상 차려 먹는 것으로 명절 문화를 정착시켰다. 올 해도 새우와 전어회, 생선 모둠회를 사다가 먹기로 했고 나는 추석 전야에 우리 네 가족만을 위한 줄줄이 꼬치 전을 세 판만 부쳐 한 자리에서 먹고 끝냈다.
오늘 횟집에 들려 회을 준비해 점심을 먹으러 가니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다는 식탁에는 이미 육전과 동태전, 잡채가 올라와있다. 예전에 비하면 가짓수도 양도 대폭 감소 한 편이 맞고 이 정도 음식이면 굳이 내 손이 필요가 없이 걸리적거리기만 한 수준이라 음식 장만을 돕지 않은 것도 마음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 엄마가 음식 할 수 있을 때나 하지 나이 더 들면 이것도 못 해 준다는 말씀에 그냥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바리바리 싸 주시던 음식의 양도 줄었다. 냉동실에 들어가지 않고 냉장고에만 하루 이틀 있다가 추석 연휴 내에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십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새로운 명절 문화가 자리 잡힌다. 아마 안 하시던 음식을 대량 생산 하시던 그 몇 년의 명절에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허리 아프고, 기름 냄새 맡으며 음식을 하고 치우는 일, 그 수고로움을 정도를 아마 남편은 나의 지청구로 짐작했을 것이다.
냉장 휴지를 마친 반죽을 밀며 대충 적당히 어우러져 맛있는 파이 반죽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냉장 휴지, 차가운 온도에서 서로에게 조금씩 스미는 시간, 어쩌면 사람사이에서,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새롭게 생겨난 아직은 조금 어색한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휴지를 하지 않고 반죽을 성형하여 파이를 구우면 한쪽에선 하얀 밀가루가 폴폴 날리고, 한쪽에서는 물기가 많아 질척하고, 한쪽에서는 뭉쳐진 버터가 녹아내려 기름지고 구멍이 뽕 뚫릴 것이다. 가족관계도 대번에 친해지려 하면, 갑자기 바꾸려, 바뀌려 들면 이렇게 따로 노는 파이 반죽의 형국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조금 시간을 두고, 스미고, 섞이고,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가족은 십 년이 걸렸는데, 다른 가족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긴긴 명절이 더 이상 반갑지는 않은 연령이다. 어딜 나가면 나가는 대로 다 돈이고, 시댁에 가도 친정에 가도 발 뻗고 누울 곳이 없어 내 집이 최고인데 그마저도 애들이랑 있으니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하루 세끼씩 일주일이면 스물 한 끼, 바셀린 바른 손을 비닐장갑에 수시로 밀어 넣는다. 오죽하면 신랑에게 손에 바셀린을 주사하고 싶다 했을까, 조금씩 스스로 나오도록 말이다. 꼬박 붙어있는 아이들과도 냉장 휴지의 시간을 갖는다. 패드도 쥐어주고, 디즈니 영화도 틀어준다. 나는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신랑은 낮잠도 자고 게임도 한다.
독자님들의 가족은 어떠신가요? 냉장 휴지의 시간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스트레스받지 않는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냉장 휴지를 마치고 구운 애플파이는 참 맛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