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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가나나 Jul 03. 2021

일기콘 24일 <이력서 쓰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요.>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 박물관에서 5개월 근무할 계약직으로 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문을 우연히 보게 됐다. 요즘, '난처한 미술이야기'라는 책을 읽으며 고전 미술과 문화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데 박물관에서 일을 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시청 공고 게시판에서 이력서를 다운로드하여 작성한다.


사실, 새로운 경험도 좋겠지만 남편과 함께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은지도 이제 8개월 차에 접어 드니 슬 슬 답답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던 참이다. 나는 시 쓰기 모임, 학교 공부로 나름 바쁜 날을 보내는 것 같은데 남편은 그런 나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라 조금 떨어져 있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세계여행을 하게 될 때 자금이 조금 더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이유도 있었다.


계약직인데도 정규직 채용 못지않게 요구하는 서류가 많다. 하긴, 시에서 관리하는 곳이니 아무나 뽑을 수도 없지 싶다. 응시원서부터 차근차근 적어 나가다 자기소개서에서 막힌다. 성장배경, 성격의 장단점, 포부까지... 내가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낸 게 10년 전이었던가? 그것도 거의 재탕에 삼탕에 오탕까지 했던 케케묵은 내용이었다. 항상 '동양의 나폴리 통영에서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풍족하진 않지만...'으로 시작했었지....라는 생각에 미치자 이제 그 내용은 빼도 되지 않을까 싶10분쯤 고민하는데 남편이

남편 : "그냥 아무거나 써 아마, 자기껀 읽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나 : "아니, 왜??"

남편 : "젊사람 뽑지 않을까??"

나 :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거야??"

남편 : "그건 아닌데...."

'일을 안 하기로 해놓고 하겠다고 하는 게 싫은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남편이 싫다고 해도 할 거니깐 '내가 일하는 게 싫은 건지' 물어보지 않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까지 쓰고 필요서류를 출력하는데 박물관이 있는 지역 거주자인지 확인하는 서류를 제출 하라길래 주소 확인사항이면 무조건 '초본'이라는 생각으로 초본을 출력하는데 옆에서 남편이 한마디 한다.

남편 : "등본을 뽑아야지."

니 : "주소 확인이면 초본이지..."

남편 : "아니, 회사에서 초본 떼오라는데 있어?"

나 : ".... 그럼 등본 뗄게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력서 쓰는데 왜 이렇게 참견일까 싶었지만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과거 주소 표시사항이 나오게 등본을 뗐다.


출력해놓은 응시원서를 남편이 보더니 상동이라고 쓴 걸 보고 딴지를 건다.

나 : "상동이라고 다쓰잖아."

남편 : "서류에 그렇게 쓰면 안되지 똑같아도 다 써야지..."

나 : ".............." (수정함.)


작성을 모두 끝내고 서명을 하는데 워드에 서명 이미지를 가져다 붙였더니

남편 : "서명은 직접 해야지."

나 : ".... 요즘엔 이렇게 해서 pdf로 변환해서 메일로 보내는 거지... 오빠, 내가 하던 일이 문서 작성인데 내가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하겠어?"

나도 이번엔 한마디 했더니 갑자기

남편 : "응시 원서 이름 옆에는 '(인)'인데 도장을 찍어야지 서명을 하면 어떻게."

나 : "양식이 옛날 거니깐 '(인)'인가 봐 특별한 경우 아니면 요즘엔 서명하잖아."

남편 : "거기서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했을지는 어떻게 알아?"

나 : " 진짜 별 희한한 걸로 계속 딴지 걸래? 5개월짜리 계약직 이력서 쓰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네.......... 그냥 나 대신 오빠가 써서 가져다 내라."

남편 :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거야?"

나 : "오빠, 꼰대야? 꼰대네"

남편 : "................."


그렇게 결국 싸웠다. 일을 한다니깐 그게 못마땅해서 그러는 건지... 역시 이번에도 5분 만에 남편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서 냉전이 오래가지 않았다. 한 번씩 꼭 저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 날이 있다. 진짜 이력서엔 '상동'을 적으면 안 되는 건지 거주지 확인용 서류는 초본이 아니라 등본을 떼야하는 건지 (인)에는 무조건 도장을 찍어야 하는 건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았다. 아니, 이력서 쓰는 게 부동산 계약서 쓰는 것보다 힘들건 뭐람....


오전에 사람 기분을 그렇게 상하게 해 놓고선 점심으로 장어를 구워준다. 이게 병 주고 약 준다는 건가? 나 이렇게 남편 한데 사육당하고 있는 건가? 싶다................  기름에 튀긴 장어는 왜 이렇게 맛있는지................ 남편은 인덕션 앞에서 기름 튀는 거 맞아가며 바삭바삭하게 뛰긴 장어를 따듯할 때 먹어야 맛있다며 내 접시에 계속 채워줬고 나는 아침에 별것 아닌 걸로 꼰대라고 한 게 미안해질 만큼 배가 불렀다. 이러니 사랑 안 하고 배길까....  


오늘 밤에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오빠, 내가 일하는 게 싫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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