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 백빈건널목
더위와 폭우가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다. 높은 습도와 온도로 푹 고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고약한 날씨는 활동성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거진 한 달을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매주 주말 새벽마다 타던 기차를 타지 못하니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좌석의 촉감, 은은한 조명, 차창을 타고 들어오는 밝은 빛과 에어컨 바람의 시원함 같은 오감의 자극이 절실한 요즘이었다.
목포 여행에서 얻은 기차 여행에서의 에너지는 다음 주까지 아껴 써야 했지만 이미 모두 소진한 후였다. 묘안이 필요했다. 멀리 가지 않고도, 기차를 타지 않고도 열차를 볼 수 있다면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이곳은. 용산 백빈건널목이다.
출근길. 가방에 카메라와 배터리, 스트랩을 챙겼다. 회사 근처에 위치한 이곳을 걸어가며 동네 구경도 하고, 체력이 방전되지 않는다면 따릉이를 타고 한강을 달릴 계획까지 세웠다. 자율근무제를 시행하는 회사가 이럴 때는 무척이나 고맙다. 16시 30분. 회사 정문을 나와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집게핀으로 틀어 올리고 스트랩과 카메라를 연결해 어깨에 들처멨다.
건널목에 도착하기 전, 고압 전류선 너머로 달리는 열차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위치는 설렘 포인트 그 자체다. 기차여행은 고유의 맛이 있다. 그 맛은 잘 차려진 한정식 같아 기차의 출발과 도착까지 어느 한순간도 맛있지 않은 풍경이 없다. 향토적이고 익숙하면서도 날씨에 따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여행의 맛이 달라지는 것이 참 닮았다.
선로를 바라보며 열차를 기다린다. 몇 대의 열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마 위로는 참다못해 터진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등줄기로도 여러 갈래로 땀이 흘렀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이번 한 번만 더'를 수차례 외치며, 달려오는 여러 대의 열차의 후미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최근 일주일은 스트레스가 전혀 해소되지 못하고 매시간마다 새로운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이기만 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을 한 건 아닐까 자책도 했으며, 거취 결정을 두고도 끊임없이 저울질을 해야 했다. 달리는 열차를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보니, 그간 여행에 대한 갈증이 대단히도 컸음을 절실히 느꼈다.
건널목으로 내려가 작은 동네의 정취를 느껴본다. 용산은 이렇게 도로 옆으로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더러 있다. 한강대로 백빈건널목, 이촌역, 서빙고역 등이 있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단연 돋보인다. 자동 차단기와 선로, 전선이 주변 건물과 어우러지는 이곳의 모습은 자주 봐왔지만 여전히 낯설다.
길 가장자리에서 몇 대의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더 바라보다 인근을 걸어본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큰 길가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작은 골목이 시선에 담긴다. 집집마다 심어진 대추나무, 호박, 토마토, 이름 모를 식물들이 반갑다. 아무 고민 없이 골목을 휘저으며 뛰어다니던 한없이 어렸던 내가 그리워져였는지도 모른다.
용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용산에서 풀고 있다는 게 모순적인 듯, 역설적이다. 용산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할지, 아니면 물에 잘 섞인 가루약처럼 무색·무취로 녹아들어 있어야 할지 오늘도 끊임없는 고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지만 안쓰럽다. 이렇게 오늘도 이울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