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 궁정동 & 부암동
오래된 티코를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오르던 어느 해의 모든 계절이 떠오른다. 봄이면 날아드는 민들레 홀씨가,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진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끝없이 펼쳐지던 고궁 옆 산책길이, 아주 눈이 많이 왔던 추운 날 나무 위로 켜켜이 쌓인 눈이 곧 후두두 떨어질 것 같던 겨울날이 눈에 선하다. 여태껏 살아온 삶 중 온전한 가족의 형태로 살았던 짧은 나날의 일부여서인지 그 당시 갔던 곳들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각색되었을 수 있지만 순수한 눈으로 담았던 풍경은 여전히 같다.
그래서였을까. 광화문과 삼청동, 부암동은 늘 특별했다. 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찾아가는 남들이 잘 모르는 조용한 산책길도 광화문 일대였고, 이 일대를 배경으로 쓰인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였다.
이 주변에서 나빴던 기억은 이때가 유일한데,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체벌은 당연했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고등학생일 때까지 12년을 남녀공학을 다녔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가장 심했고, 그때 담임교사는 60대 여성임에도 상당히 가혹하고, 무자비한 체벌을 많이 했다. 일부러 잘 보이는 종아리를 매질하고 교복 아래로 보이는 팔뚝에 매질을 했다. 어느 날은 체벌을 당하는 도중 울다 호흡곤란이 와 보건실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과목은 국어 교사였는데 여러모로 유별난 교사였다. 남편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한다고 했었고, 명절 때마다 유명인들이 집으로 인사를 하러 온다며 으스대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가을에 청와대 분수대 근처 공원으로 반 학생들과 은행을 주우러 가고는 했었다. 내가 졸업하고 다음 해에 청와대 근처 중학교로 전근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지. 지금 어른이 되고서 생각해봐도 그 당시에 좋은 추억은 없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이곳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은 지도 벌써 2년 남짓 되었다. 주말은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평일만큼은 늘 고요하고 서울 속의 작은 시골을 보는 듯 아담하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의 모든 일들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동네다.
7월이 되면 청와대 바로 옆 무궁화동산은 눈이 즐거운 산책로가 되는데, 색색의 무궁화가 꽤 넓게 심어져 있다. 바삐 움직이는 작은 꿀벌과 열 걸음도 가지 못하고 흙냄새를 맡기 바쁜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즘 개체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해서인지 꽃 사이를 바삐 움직이며 꽃가루를 옮기는 꿀벌이 특히나 반갑다.
아직 만개한 시기는 아니지만 피어있는 꽃들은 수술대와 꽃가루까지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만개했고, 꽃잎에는 시들거나 상처가 없어 곧은 성품의 선비처럼 고결하다. 작년에는 시기를 놓쳐 다 시든 꽃잎만 봐서인지 올해 본 무궁화는 예뻤다. 무궁화를 보며 특별한 생각을 가진 때는 이날이 처음이다. 이렇게 자세히 본 때도 이날이 처음이다.
집에서 시내 중심으로 나가는 버스는 대부분 효자동을 지나 광화문으로 가는데, 길에 핀 무궁화를 보며 문득 생각이 나 '퇴근 후에 카메라를 들고나가 봐야지.'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무궁화도 오래 보니 확연히 드러나는 강단 있는 아름다움이 여러 겹의 꽃잎 속에 배어있다.
아쉽게도 시간이 늦어 칠궁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시간 여유가 있거나, 혹은 청와대 관람을 왔거나, 또는 청와대 뒤편 북악산을 올라가는 등산객이라면 칠궁을 가보는 것도 좋다. 왕의 생모이나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인데 관리가 굉장히 잘 되어 있고, 개인적으로는 현판이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하는 곳이다. 무궁화동산에서 현장 접수를 하거나, 사전 예약을 하면 방문할 수 있다.
이제 자리를 옮겨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움직여본다. 무궁화동산에서 청운중학교를 지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향하는 곳은 광화문 방향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장소다. 운동 삼아 산책을 가다 보면 항상 이곳에서 야경을 내려다본다. 20여 년을 남산 근처에서 살았어서인지 남산 서울타워가 보이면 고향역에 내리는 사람들처럼 고향에 온 기분이 든다. 이제는 이곳이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지만 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에 둘러싸인 소중한 보금자리. 집 앞으로는 홍제천이 지나가고 우거진 녹음이 있어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설레는 동네다.
산보다 바다를 좋아했지만 어느새 바다만큼 산을 좋아하게 됐고, 집 뒤로 나 있는 계곡길을 따라 북악산 정상을 오르는 날은, 흐르는 땀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빠지는 숨을 타고 들어오는 푸른 풀잎과 짙은 나무의 내음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은 야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남산을 중심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색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해가 떨어지고 창의문으로 향하며 동네 친구이자 애정의 대상인 남자 친구에게 '빙수 먹으러 가자.' 전화를 걸어본다. 그도 흔쾌히 응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또 다른 '살아있음'을 느끼러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