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 | 아가페 정양원
'Muse'를 만나기 위해 전북 익산으로 떠났다. 이번 여행은 여러 갈증이 한꺼번에 풀릴 것을 기대하고 떠나는 여행이다. 첫째는 여행 그 자체, 둘째는 한 달여만에 타는 기차, 셋째는 첫 관람한 공연이 하필 전체 총 마지막 공연이어서 더 볼 수 없어 늘 아쉬워했는데 지방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접해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넷째는 4월 이후로 처음인 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면 한 곳이라도 더 둘러보고 싶어 시간을 쪼개고, 여행지를 더 꼼꼼히 살폈을 것이었으며, 새벽 기차를 타고 떠났을 것이 자명하다. 이번 여행은 동행인이 있기에 최대한 많은 것을 버리고 원래 목적인 'Muse'를 만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딱 한 곳만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여행 당일이 되었고, 새벽 기차가 아닌 오전 기차는 승객들로 가득했다. 플랫폼 가득 서 있는 승객들의 옷차림에서 여름이 느껴진다. 가볍고 얇은 상의, 무릎 위로 자리 잡은 바짓단, 최소한의 고정 장치만 있는 신발들이 그랬다. 여행 중 가장 기다리던 순간인 기차 승차의 순간. 좌석에 앉기 전 가방을 머리 위 선반에 올리고 좌석에 앉아 차창 밖의 선로를 보니 그제야 설렘이 느껴진다.
한 시간 반쯤 달렸을까, 기차는 어느덧 익산역에 도착했고, 물품 보관소에 배낭을 보관한 뒤 택시를 타고 익산 여행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아가페 정원'. 익산 여행하면 아마 미륵사지를 가장 많이 방문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미 다녀온 곳이고, 동행인은 썩 가고 싶어 하지 않아 일정에 포함하지 않고 이곳을 가보기로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관리인이 예약자명을 묻는다. 아뿔싸. 우린 예약을 따로 하지 않았다. 예약이 필요한 곳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친절하신 관리인은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오늘은 방문자가 많지 않아 입장이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입구부터 보이는 배롱나무를 보고 설렌 마음이 놀란 마음에 푹 사그라들었지만 이내 다시 설렘이 채워진다. 주말은 2주 전에 전화 예약을 해야 방문이 가능하다고 하니 방문 예정이 있다면 참고하기를.
노인 요양원에 입소한 입소자들을 위해 정원을 가꿔 이후 일반인에게 개방한 곳이기에 분위기는 차분하다. 관광지의 개념으로 방문하기보다는 쉼을 위해 잠시 벤치 하나를 빌린다는 느낌으로 방문하면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입구를 지나 우측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걸어본다. 정비가 매우 잘 되어 있는 산책길의 양쪽은 소나무와 단풍나무, 향나무로 가득하다. 나무 군락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그간 가득 채워 넣다 못해 욱여넣은 불필요한 상념을 잊게 된다. 하늘을 덮는 키 큰 나무들, 흙을 가리는 잘 자란 풀잎들, 나무 사이 세워진 잘 패진 장작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름날의 햇살,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들. 카메라로 다 담기지 않는 초록의 색감은 생동감이 넘친다.
어린 딸과 함께 발갛게 색감이 올라온 배롱나무 앞에서 이 시간의 추억을 남기는 젊은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어림잡아 어린 딸보다 다섯 배는 큰 배롱나무는 절정에 이른 듯했다. 흰 원피스를 입은 작은 아이는 그 속에서 더 빛나고 있었다. 아이가 더 자라 이날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기억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보이는 곧게 뻗은 메타세콰이아 나무 사이로 들어가 본다. 올려다본 하늘은 초록으로 덮여있다. 메말라 보이지만 속이 꽉 찬 나무는 사잇길을 빠져나가지 말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가지 위로 돋아난 초록의 잎사귀에서는 나무의 겉껍질과 대조되는 푸른 생명력이 느껴진다.
일천여 개가 넘는 한자 중에 수풀 림(林) 자를 가장 좋아한다. 숲은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고, 뿌리가 깊게 내린 나무에서는 기개가 느껴진다. 곧은 성품과 자연에 녹아드는 삶, 누군가에게는 쉼의 공간을 내어주는 숲과 같이 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이곳과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짧지만 깊은 고민을 했다. 'Muse'를 만나기 위해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다. 하늘 끝에 닿을 듯 솟아오른 나무들에게서 심심한 위로를 받고 아쉽지만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 본다.
이번에 익산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익산에 뭐가 있긴 하냐는 반응들이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남들이 짜 놓은 코스를 따르지 않아도, 꼭 유명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가 마음을 연 곳, 내 발길을 멈춘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익산은 완벽한 여행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