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 영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다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신작 영화 '대홍수'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처음 제목과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대중은 영화 '해운대'나 '투모로우' 같은 시원한 재난 블록버스터의 탄생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기대했던 전형적인 재난 영화가 아닌 SF 장르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SNS와 각종 커뮤니티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혹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영화가 재미없다는 반응을 넘어, 이번 논란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향한 도 넘은 비난입니다. 극 중 자인 역을 맡은 권은성 배우는 이제 겨우 11살입니다.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이 이 배우 부모님이 운영하는 개인 SNS 계정까지 찾아가 입에 담기 힘든 악플을 남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해당 계정은 댓글 기능이 차단된 상태입니다. 이 작품을 향한 과격한 반응들에 대해 허지웅 평론가나 황석희 번역가 등 유명 인사들이 SNS를 통해 일침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수위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영화가 어떠했길래 아이에게까지 험한 말이 쏟아지는지, 그 배경과 작품의 내막, 그리고 대중 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비난과 비판 사이비난과 비판 사이
영화라는 콘텐츠는 대중의 평가에 의해 그 성패가 결정됩니다. 관객은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기에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역을 연기한 배우나 감독 개인에게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그것이 작품에 대한 후기와 감상의 영역을 넘어 한 개인에 대한 공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감정을 배제하고 본 영화의 완성도는 어떠했을까요. 냉정하게 말해 이 영화는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나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는 힘든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받고 있는 비난처럼 영화적 완성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소위 망작 수준도 아닙니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나 감정선이 다소 뻔하고 투박한 면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냥저냥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평작 수준의 영화였습니다.
관객의 배신감
평범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첫 번째 이유는 장르적 배신감과 영화 내적 설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대홍수'는 표면적으로 물이 넘치는 자연재해를 뜻하지만, 동시에 성경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대홍수가 타락한 세상을 씻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리셋의 도구였듯, 영화 속 홍수 역시 타락하고 망가진 인류 문명을 종결짓고 우주에서 시작될 신인류를 위한 배경으로 사용됩니다.
영화 속 사건 발생 날짜가 7월 7일인 점도 이러한 종교적 메타포와 연결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마치고 안식을 취한 날이 7일째이며, 노아의 홍수 역시 7일 뒤 비를 예고하며 옛 세상을 닫고 새 질서를 여는 시점이었습니다. 숫자 7은 완전함과 한 주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영화는 이 7이라는 숫자를 차용하여, 대홍수를 현생 인류의 초기화, 즉 리셋 버튼으로 설정했습니다. 단순히 장마철이라는 배경을 넘어 의도적인 설정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관객의 기대치였습니다.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시원한 물난리 재난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으나, 실제 내용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 같은 루프물 혹은 SF 시뮬레이션 드라마에 가까웠습니다. 기대했던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데서 오는 1차적인 배신감이 컸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지구가 멸망해가는 마지막 날, 인공지능 연구원 안나가 물이 차오르는 아파트에서 아이 자인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내용입니다. 구조대원 희조의 미묘한 행동과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관객은 소위 '아시발꿈!' 엔딩과 유사한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논란의 중심이 된 아역 캐릭터 자인의 행동도 분노 유발 요인이었습니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징징거리는 모습에 최고의 피임 영화라는 비아냥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임을 감안하면 캐릭터의 행동은 설명이 됩니다. 자인은 안나의 인내심과 모성애를 극한까지 테스트하기 위해 설계된 변수였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AI라면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짐이 되는 아이를 버렸겠지만, 영화는 비합리적이고 짜증 나는 존재를 끝까지 끌어안는 안나의 선택을 통해 인간성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즉, 관객이 아이에게 짜증을 느낄수록 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인간애가 돋보이게 설계된 장치였습니다. 영화는 인간이 AI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겠지만, 많은 관객은 그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거나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소비 심리
영화 내적인 이유를 넘어, 최근 변화한 대중의 소비 심리 또한 이번 논란의 중요한 원인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6'에서 제시된 몇 가지 키워드를 대입해 보면 현재의 격렬한 반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필코노미(Feelconomy)입니다. 소비가 곧 기분 관리가 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현대인에게 영화 관람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그날의 기분을 관리하는 행위의 일부입니다. 직장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원한 재난 영화를 선택했으나, 복잡한 철학적 질문과 답답한 전개로로 인해 기분을 망치게 되자 관객은 이를 불량 상품으로 인식하고 정서적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레디코어(Ready-Core)입니다. 불확실성을 싫어하고 완벽한 계획을 선호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리스크 관리 자산으로 보는 성향입니다. 내 귀한 시간을 투자해 예상된 재미를 얻고자 했으나 영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에 보상 심리와 공격성이 발동한 것입니다.
셋째는 프라이스 디코딩(Price Decoding)입니다. 가격을 세분화하여 납득할 수 있는지 분석하는 소비 양식입니다. 관객은 자신의 2시간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영화에 대해 가성비가 떨어지는 실패작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막대한 예산과 대배우들을 쓰고도 결과물이 미흡하다는 사실이 분노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평작이 설 곳 없는 시대와 알고리즘의 폐해
이러한 소비 심리의 변화 기저에는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 OTT 플랫폼의 발달로 전 세계의 웰메이드 콘텐츠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면서 대중의 안목은 상향 평준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홍수'와 같은 평작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100편 중 10편의 수작을 제외한 나머지 90편의 평범함은 이제 용납되지 않습니다. 걸작이 아니면 쓰레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만이 존재하며, 킬링타임용 영화나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은 시간 낭비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라인 알고리즘 구조가 불을 지핍니다. 자극적인 분노와 조롱 콘텐츠가 더 많이 노출되면서 비난의 수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집니다. 이 정도로 욕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퍼지고, 익명성에 기댄 집단적 비난은 아역 배우 SNS 테러와 같은 가해 행위로 이어집니다. 또한, 콘텐츠 과잉 시대에 조금이라도 별로면 가차 없이 1점 폭격을 날리고 혹평을 남기는 행위 자체를 자존감 회복 수단으로 삼는 일부 관객들의 심리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성숙한 비판 문화를 위하여
물론 콘텐츠에 대한 비판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감독의 연출력 부재나 시나리오의 개연성 부족을 지적하는 것은 창작자가 겸허히 감수해야 할 몫입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불호가 창작자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저주를 퍼붓는 명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싫다는 감정 표현과 상대를 해치려는 악의적 공격은 엄연히 다릅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목격되는 표현들은 비판의 탈을 쓴 언어폭력에 가깝습니다.
자극적인 단어로 상대를 깎아내려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결국 말하는 사람 자신의 인격과 품격을 떨어뜨릴 뿐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며, 누군가에게는 졸작인 영화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작은 평작대로, 졸작은 졸작대로 그 위치에서 평가받으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 공간이, 그리고 온라인 공간이 조금 더 관대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향해 날 선 칼날을 휘두르기보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겨두고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비판은 날카롭게 하되, 그 안에는 존중이 담겨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