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하려 하지 말고 그저 풍경에 몸을 맡길 것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에 앞서 솔직한 질문을 하나 던지며 시작해 보려 합니다. 혹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걸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셨나요? 평단의 극찬을 받은 명작임에는 틀림없지만, 긴 러닝타임과 특유의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잠깐이라도 졸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 분명 계실 겁니다.
이런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리뷰할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여행과 나날' 역시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중요시하는 관객들에게는 꽤나 불친절하고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기승전결이나 딱 떨어지는 서사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으신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다니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심지어 GV까지 챙겨 들었음에도 여전히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가 멍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곱씹어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영화를 보고 당황했을 분들, 혹은 관람 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이 영화가 건네는 독특한 화법과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풀어보려 합니다.
원작과 연출이 만났을 때
이 영화가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원작자와 감독, 두 예술가의 스타일이 결합하며 만들어낸 독특한 시너지에 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은 일본 만화계의 거장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합니다. 츠게 요시하루는 꿈의 리얼리즘이라 불릴 정도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몽환적인 분위기, 그리고 인물들의 알 수 없는 기행을 그려내기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논리적인 설명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여기에 미야케 쇼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 더해지며 그 난해함은 배가됩니다. 감독의 전작들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야케 쇼는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이나 서사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타입이 아닙니다. 인물이 왜 슬픈지, 왜 기쁜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보다 그 인물이 머무는 공간의 공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의 질감,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스크린에 담아내는 데 탁월합니다.
서사보다는 정서를, 논리보다는 감각을 중요시하는 감독과 꿈과 현실을 오가는 몽환적인 원작자가 만났으니 영화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영화를 보며 저게 뭐지, 도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지라는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해력 부족을 자책했으나, 두 창작자의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여름의 허구와 겨울의 실재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독특한 이중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덩어리, 여름의 이야기와 겨울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으며 이는 곧 허구와 현실의 대비를 의미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먼저 여름의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아주 묘하고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사실 이 부분은 영화 속 현실이 아닙니다. 배우 심은경이 연기한 주인공, 작가 이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 속 세상인 것입니다. 원작자의 단편 '해변의 서경'을 각색한 이 파트에서는 현실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몽환적인 대화들이 오고 갑니다.
화면이 전환되면 우리는 차가운 겨울을 마주합니다.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작가 이는 도망치듯 눈이 쏟아지는 설국으로 떠나 지도에도 없는 낯선 여관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무심한 듯 보이는 여관 주인 벤조를 만나 기묘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겨울 파트는 원작자의 또 다른 작품인 '혼야라동의 벤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영화는 이렇게 여름의 허구와 겨울의 실재라는 계절의 대비를 통해 창작의 고통과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여름의 두 남녀는 몽환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겨울의 주인공 이는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써지지 않는 글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
영화 속에서 주인공 이가 내뱉는 대사 중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대사가 있습니다. 근처 관광 명소는 가봤냐는 여관 주인 벤조의 질문에 이는 관광 명소 같은 건 관심 없고, 그냥 흐르는 강물만 보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이 대사는 창작자인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주인공 이는 말과 글을 다루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그녀에게 언어는 더 이상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고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글로 정의해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심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녀가 사회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관광지를 거부하고, 아무런 의미 없이 물리적으로 흐를 뿐인 강물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 멍하니 존재하는 시간을 되찾기 위한 도피입니다. 그녀의 여행은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한 생산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숨구멍을 찾는 치유의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치유 버전의 샤이닝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른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명작 호러 영화 '샤이닝'입니다. 두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와 고립된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 폭설로 갇혀버린 산장 혹은 여관, 글이 안 써져 신경이 잔뜩 곤두선 예민한 작가, 그리고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의 숙소 주인까지 설정만 놓고 보면 거의 판박이 수준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샤이닝'의 잭 토랜스는 그 고립 속에서 광기에 휘말려 결국 도끼를 들고 가족들을 위협하며 파국으로 치닫지만, '여행과 나날'의 주인공 이는 그 고립 속에서 오히려 안식을 찾습니다. 여관 주인 벤조는 도끼를 들고 쫓아오는 대신,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며 타인으로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치유 버전의 '샤이닝'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고립이 공포가 아닌 치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가 오히려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제목이 품은 두 가지 시선
제목에 담긴 의미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어 제목인 '여행과 나날'은 일본어 원제를 직역한 것입니다. 이는 여행이라는 특별한 비일상과 나날이라는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서로 맞닿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행은 결국 끝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다시 나날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영문 제목은 'Two Seasons, Two Strangers', 즉 '두 계절과 두 낯선 이방인들'입니다. 이는 영화의 구조적인 특징인 여름과 겨울이라는 두 계절의 대비, 그리고 그 속에서 마주친 낯선 타인들을 강조하는 제목입니다. 타지인인 이와 여관 주인 벤조, 그리고 극중극 속의 남녀처럼, 우리가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타인들과의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결국 삶을 이룬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분석을 멈추고
정리하자면 영화 '여행과 나날'은 저처럼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따지기 좋아하는 성향의 관객에게는 분명 불친절하고 어려운 영화일 수 있습니다. 명확한 기승전결이나 속 시원한 사이다 결말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내며 종이에 글을 쓰듯이, 이 영화는 머리가 아닌 감각으로 체험해야 하는 작품입니다. 내용을 분석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그 눈 내리는 하얀 풍경과 소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마치 주인공 이가 흐르는 강물을 그저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죠.
다음에 VOD로 이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도 그때는 내용을 분석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주인공과 함께 눈 내리는 풍경 속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어 보려 합니다. 혹시 복잡한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한 눈밭에 파묻히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꽤 괜찮은 피난처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