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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화의 가치를 재단하는가

‘불쌍한 관객’이라는 오만한 시선에 던지는 질문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PGTlK1_7X1o?si=tI68rJ9jFvyC2tgs&t=693

최근 '매불쇼'의 '시네마 지옥' 코너에서 한 영화 평론가가 영화 '좀비딸'을 두고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한국영화가 맛탱이가 완전히 갔구나", "영화 자체의 퀄리티를 논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이런 영화에 몰려가는 관객들이 불쌍하다" 와 같은 발언으로 영화와 관객 모두를 평가절하했습니다. 날카로운 비평은 건강한 영화 산업의 자양분이 될 수 있지만, 그의 발언은 단순한 비평을 넘어 매체의 본질과 관객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편협한 엘리트주의를 드러냅니다.

'퀄리티'라는 편협한 잣대

해당 평론가는 '좀비딸'이 "퀄리티를 논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과연 '퀄리티'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 기준을 독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영화가 칸 영화제 출품작처럼 예술적 성취나 철학적 깊이를 담아야만 가치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일까요?


클래식 음악의 잣대로 K팝의 가치를 잴 수 없듯, 각기 다른 목표와 문법을 가진 영화를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장르에 대한 몰이해이자 폄훼일 뿐입니다.

관객의 웃음을 폄훼하는 오만함

"이 영화를 보고 웃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라는 그의 의문은 이번 발언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지점입니다. 코미디 영화에 터져 나온 관객의 웃음은 그 영화가 소임을 다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입니다.


관객은 평론가의 고상한 취향을 만족시키려 영화를 보지 않습니다. 고단한 일상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합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여기는 태도는, 대중의 취향을 '수준 낮은 것'으로 보는 선민의식 입니다.

'불쌍한 관객'이라는 모독

"이런 영화에 몰려가는 관객들이 불쌍하다"는 발언은 비평의 선을 넘은 명백한 모독입니다. 관객은 동정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소비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봉준호, 박찬욱의 영화가 최고의 사유를 안기는 작품이듯, 다른 누군가에게는 '좀비딸'이 지친 하루의 피로를 날리는 가장 값진 영화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영화를 봅니다. 가볍게 웃고 싶을 때,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때, 때로는 B급 감성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욕구와 선택을 '불쌍하다'는 한마디로 재단하는 것은 관객의 개성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시선입니다.


'질 좋은 영화'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건강한 영화 생태계는 다양성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예술 영화와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오락 영화 모두 영화 산업을 이루는 소중한 축입니다. 모든 관객이 한 가지 종류의 영화만 즐겨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문화의 폭을 좁히고 산업 전체를 경직시키는 위험한 발상일 뿐입니다.


모든 영화가 칸 영화제를 목표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업 영화, 장르 영화, 독립 영화, 예술 영화가 각자의 자리에서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줄 때 생태계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따라서 '좀비딸' 같은 작품 역시 한국 영화의 한 부분으로서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어떤 영화를 선택하고 즐길지는 온전히 관객 각자의 기준과 취향에 따른 자유로운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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