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챠오챠오 Feb 26. 2021

메갈련 만만하니 - 권선징악의 이론과 실제

성구매자와 열흘간의 신용카드 공유기

* 제목은 지인들 대상으로 한 제목 공모전의 당선작입니다.



 나는 범죄 수사물을 좋아하고 즐겨 보지만, 실제론 대서특필할 사건들이나 어둠의 세계와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살면서 경찰서에 직접 가 보거나 수사과정을 세세하게 지켜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작년, 어느 성구매자와 열흘간 신용카드를 공유한 일로 경찰의 수사과정을 꽤 가까이서 지켜보며 수사드라마와 실제 경찰 수사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 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아래는 그 사건의 경위와 수사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 7월, 어느 한가로운 오후였다. 간만에 여유롭게 연희동 집 방바닥을 뒹굴거리며 약속시간을 기다리던 나는 뜬금없이 출금 메시지를 받았다.

'한강oo편의점, 4500원 출금 2020.07.14 17:20'

 '한강...? 그즈음 한강을 간 일이 없는데 왜 출금 메시지가 뜨지..?' 나는 얼른 카드 사용내역을 확인해보았다. 카드 내역을 쭉 내려보자 내가 사용한 적 없는 내역이 중간중간 섞여있었다.(그즈음 나는 실물 카드가 아닌 스마트폰 앱카드만 사용하고 있었다.) 간 적 없는 지역의 편의점과 호프, 식당 등등.. 내역을 대충만 훑어보아도 한두 푼 쓴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카드를 공유하고 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발급받은 은행 고객센터에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상담원은 경쾌한 목소리로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곤 잠시 후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돌아왔다. "지금 카드 사용내역을 좀 훑어보니 열흘 전부터 그 사람이 쓴 것 같은데, 고객님이 절대 쓸 리 없는 데에 가서 카드를 긁고 다녔네요. 뭐 백화, 연꽃, 꽃호프 이런 데를 고객님이 가실리 없잖아요." 전화 너머로 상담원분의 분노에 찬 타자 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더 성난 상담원 분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해져 '내가 말려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상담원 분의 카드 분실/신고 접수 안내를 가만히 들었다. 상담원 분은 내게 "이거 꼭 경찰에 신고하세요. 경찰에 신고 안 해도 카드사에 사고 접수는 되지만... 너무 괘씸하네요."라고 덧붙이며 정말 감사하게도 신고를 하려면 내역서가 필요하니 메일로 그 인간이 쓴 내역만 뽑아 보내주겠다 하셨다. 나는 그분의 기세에 말려 그저 순종적으로 내 이메일 주소를 말씀드렸다.


 상담사분의 조언에 따라 나는 112에 신고를 했고,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해서인지 내가 있는 곳으로 바로 경찰관을 보내겠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이게 한시바삐 범인을 잡아야 하는 그런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거절했고, 신고 접수원분은 집 근처 파출소에서 접수할 수 있도록 미리 전해두겠다고 말했다.(이게 나의 실수였다.)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 Z는 함께 파출소에 가주겠다고 말해 나는 Z를 기다리며 사건에 대해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나는 카드를 언제 잃어버렸는지 조차 몰랐는데, 그 이유는 출금계좌에 잔액이 있을 땐 체크, 이외엔 신용으로 전환이 가능한 카드를 사용했고, 체크 사용으로 통장에서 출금이 될 때에만 알림이 오도록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카드를 신용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나는 결제 계좌를 카드대금 결제일 외에는 보통 비워두고 다른 계좌로 현금을 옮겨두었고, 또 그 당시 한동안 내내 스마트폰 앱카드의 편리함에 빠져 실물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물 카드가 지갑에 없어도 어디 다른 가방에 굴러다니겠지 싶어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카드내역을 발견하기 전날, 술자리 정산을 위해 친구가 통장으로 보내준 얼마간의 돈 덕분에 늦게나마 내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글을 통해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보낸다...)


 상담원 분이 메일로 친절하게 열흘간의 실물 카드 내역만 쏙 뽑아 보내주신 엑셀 파일을 읽으며 나는 내 카드를 주운 인간의 소비행태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카드로 그는 총 89만원을 사용했는데, 초반엔 편의점에서 4500원씩 째깐째깐하게 쓰다가(아마 담배를 산 것 같다) 카드 신고가 안 들어오니 점점 액수를 늘려 십몇만원씩 펑펑 긁고 택시도 타며 그라데이션 씀씀이를 보였다.



 결제 내역을 읽어보고 나서야 왜 앞서 상담사님이 굉장히 분노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자유, 백학, 산수유, 연꽃, 화원, 길다방... 촌스러운 이름들이 주는 강렬한 예감에 지도로 찾아보니 역시 방석집(다방인 척하는 성매매업소)이었다. 그 인간은 내가 신고하기 전 며칠간은 내일이 없는 인간처럼 방석집에 매일 출석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차라리 어디 마트나 식당에 가서 89만원을 썼으면 모를까, 그 성구매자 놈이 음주가무와 성매매에 흥청망청 썼다는 것에 나는 졸도할 것 같았다.


89만원을... 열흘간...



 나는 Z를 만나 함께 집 근처 파출소 문을 비장하게 열어재끼고 '내가 아까 112에 신고를 하고 신고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사람이오'라고 말했지만 파출소 경관분들은 112에서 접수된 것이 없다며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처음엔 파출소에서 알아서 해주겠지 생각했지만 경관들의 얼굴에 의아함과 피곤함이 짙어갈수록 나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내가 좀 더 자세히 상황설명을 하자 한 경관분이 안쪽 공간으로 들어와서 조서를 작성해달라고 말씀하셨고, 그 와중에 한 분이 느긋하게 화장실에서 나오며 '아, 아까 112로 신고하셨던 분이시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분에게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분노와 불안이 그득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조서 작성은 매우 단조로웠다. 파출소 경관분께 들으니 이런 사건들은 보통 파출소가 아닌 경찰서로 바로 신고가 접수되어 이렇게 파출소에 직접 신고를 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이때 아차 싶었다.) 이미 멘탈에 큰 충격이 가해진 나는 말도 글도 두서없이 뱉을 뿐이라 함께 갔던 Z가 내가 육하원칙에 맞춰 조리 있게 조서 작성을 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고 접수는 '집에 돌아가면 내일 즈음 지역 경찰서로 이관되었다는 문자와 함께 담당 형사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라는 안내를 마지막으로 아무런 긴장감 없이 끝나고 말았다.


 어쩐지 허탈한 마음으로 Z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지인들에게 웬 성구매자가 내 카드로 방석집에서 근 90만 원을 긁었다는 걸 전하자 모두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메갈련'의 카드를 주워 방석집에서 89만원을 긁은 게 아주 한국적인 블랙코미디라며 즐거워했다. 당사자로선 상황이 굉장히 열 받긴 하지만 나조차도 이 부조리극 같은 상황이 제법 웃겼다.


이건 역대급 글감이로군




 다음날 오후, 서대문 경찰서 강력범죄팀으로 수사가 이관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서 본 건 많은 나는 통화를 녹음하고, 재차 성함과 직책을 묻고, 심지어 통화가 끝나면 명함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형사님은 나의 끈질김에도 친절하게 답해주시며 상황을 자세히 묻고, 앞으로 어떻게 수사가 진행될 것 인지, 그리고 내가 증거로 보내주어야 할 자료는 무엇인지 안내해주셨다. 앞서 부서 간의 소통 부족으로 파출소에서 작은 곤경에 처해 대한민국 경찰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나는 수사과정의 체계적임에 감동하며 보이스피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풀었다. 한껏 긴장이 풀린 나는 '강력계 형사팀의 모습을 글감으로 쓰고 싶다'는 음험한 기대를 가지고 내가 경찰서에 직접 가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지만, 형사님은 직접 오지 않아도 된다며 딱 잘라 말했다.



 형사님과의 통화를 통해 수사물에서 묘사하는 경찰과 수사과정과 실제가 꽤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놀랐던 지점이 몇 개 있었는데, 첫째로 뉴스에 나오는 억대 사기 같은 사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피해 액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팀으로 이관된 것이 놀라웠다. 강력팀에 배당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디 사회면에 실리는 건 아닌지 두근거렸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둘째로는 강력팀에 이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이나 납치가 아닌 이상 수사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수사드라마에서 피해자들이 경찰서에서 형사들을 붙잡고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나는 화를 좀 삭이고 슬프고 가련한 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실제 형사님과의 대화는 매우 건조하고 수사에 관한 이야기만 했기에 내가 울고불고할 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놀랐던 부분은 수사드라마에선 형사들이 모두 사생활 보호와 저녁이 있는 삶 따위 없이 핸드폰 딸랑 하나만 쓰지만 실제 경찰들은 보통 수사에는 업무용 폰을 쓴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형사들도 공무원이고 자기 삶과 인권이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내 사건을 담당한 형사님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사이에만 문자에 답장을 주셨다. 한편 파출소에는 업무용 폰이 하나뿐이라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나 개인 계정 이메일을 들어갈 수 없지만, 경찰서에선 형사들이 각자 업무용 개인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카카오톡이 가능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형사님께 자료를 정리해 보낸 후, 나는 그 성구매자 놈을 더욱 엿 되게 만들고 싶다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로스쿨을 졸업 후 갓 변호사가 된 지인분께 오랜만에 연락을 해 염치 불구하고 사건의 경위를 알리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을 장문의 카톡으로 물어보았고 감사하게도 자세하게 답해주셨다.  


 내가 경찰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진술서를 쓴 후엔 피의자가 잡히면 경찰 조사 후 기소 여부가 결정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증거가 명백해 벌금이 나오든 집행유예가 되든 법원이 유죄판결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셨다. 이런 카드 도용 범죄는 형사재판에 해당하므로 형사재판에서 당사자는 피고인이니 내가 재판에 출석할 의무는 없고(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내가 피해보상 요구를 위해 민사소송을 건다면 이 사건의 경우 간단히 끝나지만 그래도 소장 낸 다음 바로 재판에 출석하는 것이 아닌 변론기일이 잡히고 재판 종결될 때까지 최소 두 달이 걸린다고 하셨다... 덧붙여 민사소송의 경우 변호사는 고소장 쓸 때만 필요하고, 내가 계속 재판에 출석할 의향이 있다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민사소송 소멸시효는 10년이니 천천히 고소해도 된다고 하셨다... 후후)


 혹시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합의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는지도 여쭈어보았는데, 신용카드 도용의 경우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죄로 처벌이 되는데 이는 반의사불벌죄(합의 후 피해자가 처벌의사가 없음을 표시하면 벌할 수 없는 죄)가 아니어서 합의는 형량의 문제일 뿐 그대로 사건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해주셨다. 또한 합의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사표시인데, 피의자가 돈을 돌려주면서 그 돈을 합의금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그런 의사표시하지 않으면 합의라고 볼 수 없다고 덧붙이셨다. 다만 합의를 하면 기소될 확률이 줄고, 손해액을 돌려받을 시 감형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하셨다. 나는 이 말에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한이 있더라도 합의하지 않고 민사소송도 걸어 형량과 그놈의 경제적, 정신적 고통을 최대한 늘려주겠다는 의지가 더욱 불탔다.


 그리고 제일 궁금했던 '혹시 성매매로도 처벌이 가능한지'를 여쭈어 보았는데, 만일 고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액을 돌려받는다면 경찰에서 소극적으로 수사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줄기차게 다닌 방석집 같은 경우 대부분 cctv가 녹화되는 형식이 아닌 실시간 감시용이라 출입기록이 남기 어렵고, 만약 출입기록이 있어도 방석집에서 결제를 한 것 말고 성매매를 했다는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마 성매매 처벌은 어려울 것 같다고 답하셨다... 다만 내가 그의 사용내역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여 피해보상을 가중되게 청구할 수 있다고 하셨다... 후후...



절대고소해


 위처럼 그 성구매자 놈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던 나와 달리 수사는 매우 진척이 없었다. 형사님은 몇 주에 한 번씩 상사에게 보고하듯 내게 수사 진행 상황을 알려주셨고, 형사님의 목소리에서 진한 피곤함이 묻어 나와 나는 형사님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놈이 카드를 주로 사용한 지역이 담당 지역인 서대문구가 아닌 성북구이며, 결제한 업장 중 cctv기록이 남아있는 곳이 많지 않다고 전해주셨다. 또한 그놈의 얼굴을 확인하긴 했으나(50대나 6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라며 내게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여쭈어보셨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그 나이대 남성이라곤 우리 집 영감탱이밖에 없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노숙자일 가능성이 커서 일단 잠복수사를 진행해 보겠지만 잡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덧붙이셨다. 나는 갈 곳 없는 분노에 망연한 기분이 되었다...


 이후론 매우 지루하게 일상을 보내며 기다리다가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었고, 얼마나 더 범인을 잡는 게 힘들어졌는지 형사님에게 전해 듣는 게 내가 하는 수사협조의 전부였다. 수사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고, 형사님에게 더 이상 범인의 흔적을 찾기 힘드니 혹시 후에 다른 증거가 추가로 발견되면 그때 다시 수사를 진행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즈음까지 되자 고소에 대한 열의가 식고 더 이상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수긍했다. 형사님의 피곤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성구매자 놈과의 신용카드 공유 사건은 그렇게 경찰의 수많은 사건파일 한켠에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나름대로 공권력을 이용한 권선징악의 이론과 실제, 그 사이의 괴리감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가 체계적이긴 하지만, 살인 같은 중범죄가 아닌 이상 범죄수사드라마처럼 한 사건에 집중하여 수사가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드라마를 믿지 말고 성질 급하고 화가 많은 소시민은 공권력을 통한 정의구현 대신 최대한 사적 복수를 하는 것이 속 시원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복수심에 너무 불타면 자신이 범죄자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고로 내가 공모를 통해 받은 제목 후보들은 아래와 같다.


1. 방석집에서 89만원 지출한 썰[인터넷 어그로식]

2. 어떻게 방석집은 결제되었는가 [탐사보도식]

3. 메갈련 만만하니 [가요 변형식]

4. 어느 날 내 카드 내역서에 방석집 89만원이 자랐다 [가요 변형식]

5. 꽃호프와 메갈련[한국문학식]

6. 집에 누워있던 내게 방석집 89만원 신용카드 내역서가 날아온 건에 대하여 [라노벨식]

매거진의 이전글 둠스발렌타인데이 - 례술 최후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