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인터넷으로 대부분의 민원을 처리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주민센터(동사무소)에 방문할 일이 종종 있습니다. 가면 해당하는 민원서류를 작성하고, 대기표를 뽑고, 차례가 되면 창구로 가서 민원처리를 기다리곤 하죠.
그런데 민원서류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종이에 아무 내용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안 보이는가 알아봤더니, 특정 기업이 만든 안경을 써야 볼 수 있답니다. 물론 무료로 안경을 나눠주기는 하지만, 안경자체가 원활하게 쓰기에는 매우 불편합니다. 간혹 제거할 수 없는 광고가 붙어있기도 합니다.
안경을 가지고 와서 서류를 작성하려고 하니, 민원서류 작성에 보통 볼펜은 사용할 수 없으며, 특정 기업의 수 만원 짜리 만년필로 작성한 것만 받아준다고 합니다. 이 만년필은 민원인이 직접 사야 합니다.
자, 이렇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난리가 날 겁니다. 제가 써놓고도 보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뭐라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며,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바로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 ‘아래아한글(이하 한/글)’ 사용을 강요하는 우리나라, 특히 공공기관들의 실상입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법을 일종의 사회적 구조라 생각하면, 악한 구조도 그저 구조일 뿐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걸까요?
현재 IT 강국 대한민국의 워드프로세서 시장구조는 한/글이 이상하다시피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기관, 관공서나 그와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 혹은 개인의 경우 예외 없이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문서가 hwp 포맷으로 처리되고, 웹 상에서 작성/열람할 수 있는 전자문서나 공문들도 예외 없이 한/글 웹 뷰어를 기반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죠.
꼭 대놓고 한/글 파일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배포하는 양식 문서가 hwp 포맷이라거나 하는 문제로 인해 사용자들은 반강제적으로 한/글 프로그램 구매 및 사용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바람직한 방향과 거리가 멉니다.
“그냥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하여 쓰면 되지 않느냐”: 불법입니다.
“그거 얼마 한다고, 그냥 돈 주고 사서 쓰면 되지”: 누군가에게는 ‘얼마 안 하는’ 몇 만 원이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문제의 본질은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아니라 특정 기업의 상용 프로그램 사용을 강요하는 공공기관의 방침 자체에 있습니다.
사기업의 경우, 백번 양보하여 이런 행위가 어느 정도 용인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경우는 문제가 다릅니다. 정보격차와 접근성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할 공공기관이 단지 행정편의만을 위해 이러한 관행을 방치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hwp 포맷은 한국 표준이 아닙니다. 현재 한국산업규격 표준(KS)은 2007년부터 오픈도큐멘트 양식(Open Document Format), 즉 odf 포맷입니다.(참고) odf 포맷은 비단 문서뿐만이 아니라, 스프레드 시트, 프레젠테이션 등 오피스 애플리케이션에 관련한 포맷들을 종합하여 지정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odf 포맷이 KS 규격으로 처음 지정된 것은 2007년으로, 이미 10년가량이 흘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속해있는 국제 표준화기구(ISO) 또한 2006년부터 odf 포맷을 전 세계 표준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참고)
물론 ISO 규격이나 KS 자체가 강제 준수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자가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제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지정한 표준 자체를 국가가 스스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국제 표준 시점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아시다시피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서 포맷은 MS 워드의 확장자인 doc 또는 docx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문서 파일’ 하면 hwp 포맷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해외 기관에 보내는 문서를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hwp 포맷으로 보낸다거나 하는 도시괴담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목적으로 국내 기관의 문서를 열람하거나 양식에 맞게 제출하려는 외국인들 역시 대단한 혼란을 겪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글에 ‘how to open hwp file’이라고 쳐보시면 무수히 많은 결과가 나옵니다.
저는 무조건 해외에서 쓰는 서비스가 옳다거나 국산 소프트웨어를 무시한다거나 하는 입장이 절대 아닙니다. 단지 국가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만 폐쇄적인 갈라파고스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입니다. 심지어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사용을 권장한다는 표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구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에서부터 odf 파일 사용을 강력하게 권장하면서 널리 알리면 됩니다. 단언컨대 5년 내에 odf 파일을 주고받는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odf(Open Document Format)는 도대체 뭐길래 꼭 써야 하는 걸까요?
개방형 문서 서식은 국제 문서 표준화 기구인 오아시스(OASIS)가 표준화했으며 2006년 국제 표준 기구(ISO: International Standard Organization)가 승인한 국제 문서 파일 표준 포맷으로, 워드프로세서/스프레드시트/프리젠테이션/데이타베이스 문서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서식을 포함한다.
개방형 문서 서식으로 작성된 문서의 경우 리브레오피스(LibreOffice), 오픈오피스(OpenOffice), 구글독스(Google Docs), 사이냅오피스, 한컴오피스 등 다양한 어플리케이션과 서비스 및 미래에 출시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에서도 문서의 뷰잉, 편집, 저장이 가능함으로써 소프트웨어간 정보호환성을 담보할 수 있어, 특정 벤더의 특정 프로그램에 대한 종속성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기술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고 비용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출처: 한국 Open Document Format 사용자 모임
즉, 특정 포맷 또는 확장자를 가진 문서 파일을 열기 위해 특정 벤더의 프로그램을 사용해야만 하는 종속성을 제거하고 이를 표준화한 포맷이 odf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jpg 확장자를 가진 그림 파일은 기본 사진 뷰어로 열든, 포토샵으로 열든, 또는 윈도우에서 열든, 맥이나 리눅스에서 열든 간에 동일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문서도 이와 같이 만들겠다는 것이 odf 의 핵심입니다.
odf 형태로 저장된 문서라면, 한/글로 열든, 워드로 열든, 페이지스로 열든, 오픈 오피스로 열든, 리브레 오피스로 열든, 심지어 구글 독스나 네이버 오피스와 같은 웹 애플리케이션으로 열든 동일한(혹은 유사한) 내용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특히, 문서를 작성하고 활용하는 환경이 PC 위주에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포함한 다양한 디바이스 환경으로 전환되는 지금 시점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그럼 기존에 사용하던 한/글 프로그램은 무용지물인가? 아닙니다. 프로그램은 현재 쓰는 프로그램을 유지하되, 저장만 odf 형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odf 포맷 형태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면, 그저 라이트 하게 문서 열람과 편집을 주로 하는 유저들은 더 이상 비싼 돈을 주고 자주 쓰지도 않을 MS 오피스 또는 한컴오피스를 구매하거나, 불법 다운로드하지 않아도 됩니다. 구글 독스를 이용하거나, 리브레오피스나 오픈오피스 등의 프리웨어 오피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얼마든지 문서를 보고 편집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정부가 hwp 사용 강제를 자제하고 odf 파일로 여러 가지 공공 문서를 배포한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어서, 확인차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직접 접속해보았습니다.
랜덤하게 몇 개의 구청이나 시청, 검찰청 등의 공공기관 홈페이지를 방문해봤지만, 온라인으로 확인하거나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서식의 99%는 hwp 포맷이었습니다(정말 가뭄에 콩 나듯 pdf 파일이 있었지만, 프린트하여 수기로 작성하는 서류였습니다). 민원은 물론이고, 공개된 결재문서들 또한 웹에서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운로드 형식은 전부 hwp 포맷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경찰청 민원센터의 경우, 맥에서는 액티브엑스 사용이 불가능하다며 아예 접속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정보격차의 최소화와 디지털 접근성의 중요도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가장 앞장서야 할 정부기관이 행정편의만을 위해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은 참 안타깝습니다. 특정 프로그램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애인/비장애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은 말할 것도 없이 더욱 멀게만 느껴집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첫걸음은 특정 플랫폼이나 벤더에 지나치게 종속되어 있는 환경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정부에서 '권장'하는 수준의 표준이 아니라 아예 의무적으로 문서 규격을 정한 뒤, 그 규격을 이용하는 것에 필요한 모든 관련 제품들을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 맞는 방향입니다. 물론 두 가지 중에 어떤 방법에 더 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갈 것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정부는 이제까지 한/글 사용을 직·간접적으로 사용자들에게 강요해왔던 관행을 하루빨리 탈피해야 합니다. 공공기관부터 앞장서서 odf 파일 사용을 시작하고 권장하면서, 현재 잘못 구축되어 있는 구조를 고치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영국은 정부 공식 문서 표준을 odf로 확정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IT 시스템에 활용되는 문서 방식을 odf로 채택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현재 권고사항에만 그치고 있는 odf를 정부 차원에서 좀 더 강력하게 사용을 권장하고 유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기술이나 제도는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 가치를 온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좀 더 편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기술과 제도가 오히려 다수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신호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부 및 유관부서의 행정편의에서 비롯된 '목적으로써의 기술'이 아닌, 국민들에게 정보의 장벽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여주는 '수단으로써의 기술'이 우리나라에 하루빨리 자리잡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