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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홍진 Oct 21. 2018

생이라는 여행, <펭귄 하이웨이>

 고등학교 시절, 에반게리온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홉수가 으레 그렇듯, 그때의 나는 홀로 세기말을 살고 있었다. 늘 우울했고, 답이 없는 상념에 잠겨 있었으며, 가끔 죽음을 상상했다. 자기혐오에 빠져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자기연민에 가까웠던 것 같다. 거창하고 장황한 이야기, 이를테면 삶과 죽음에 관한 것들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이승우와 PTA의 작품들을(물론 지금도 그들의 세계를 사랑한다.) 바이블마냥 떠받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에반게리온은, 그 상징 과잉의 신화적 세계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지금에서야 그 충격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뜬금없이 에반게리온을 끌어 온 건,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펭귄 하이웨이와 에반게리온의 교집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을 모두 본 사람이라면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지금도 역작으로 회자되는, 심오한 상징들로 가득한 에반게리온과, 펭귄과 가슴얘기만 주구장창 해대는, 언뜻 얄팍해 보이는 이 영화가 대체 어떤 지점에서 닮았다는 건지 반문할 수도 있다. 사실 전반부까지만 해도 그렇다. 귀엽고 야한, 그저 그런 일본 애니의 전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그런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쩍슬쩍 흩뿌려놓은 떡밥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훌쩍 넘어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가 하는 이야기는, 에반게리온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 물론 전개방식에 있어서 여러 아쉬운 지점들이 보이지만 따로 언급하지는 않으려한다. 영화가 담고자 했던(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관념과 그것이 어떻게 에반게리온의 세계와 연결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펭귄 하이웨이 포스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엔드오브 에반게리온 포스터

 1. 어른이 된다는 것

 에반게리온을 성장영화로 읽는 관점은 흔하다. 물론 두가지 버전(극장판과 tv판의 결말) 중 극장판의 종말적 엔딩은 성장영화라 하기에는 좀 파괴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성장은 종말을 전제로 한다. 종말이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성장에는 종말이 숨어있다. 펭귄 하이웨이의 경우도 그렇다. 필자는 이 영화가 성장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영화속에서 종말은 필연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분명 존재할 것이다.    


 성장의 전제가 되는 종말은 구 세계의 종말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듯,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기존의 세계는 사라져야 한다. 본 영화를 종말과 성장의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보자.


 펭귄 하이웨이의 오프닝과 엔딩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이 독백하며 도로를 달리는 두 장면은 언뜻 반복같지만, 전체 맥락을 따지고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시작과 끝 사이에서 주인공은 한차례의 커다란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오야마는 ‘바다’와 ‘누나’를 잃었다. 바다는 곧 균열이다. 아버지가 보여준 뒤집힌 주머니처럼, 세상의 끝을 한 지점으로 모은, 아직 채 닫히지 않은 구멍이다. 균열의 상실은 완성을 의미한다. 펭귄들과 함께 균열을 봉합하면서 세계는 완전한 폐구조가 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완전한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바다’ 즉 균열이 없어지면서 아오야마가 좋아했던 ‘누나’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극 중 ‘누나’는 절대적 모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이상적이고, 늘 아오야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그녀의 가슴과, 가슴에 집착하는 아오야마의 모습도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지점이 필자가 생각하는, 에반게리온과 펭귄 하이웨이의 가장 중요한 접점이기도 하다. 아오야마와 ‘누나’의 관계가 에반게리온 속 ‘미사토’와 ‘신지’의 관계와 언뜻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두 작품 모두에서, 연상의 여성은 미성숙한 남자아이의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미묘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이 사랑에는 성적 호기심이 동반되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반게리온에서도 그렇듯, ‘누나’의 상실은 곧 모성의 상실이다. 아오야마의 세계가 완성되면서, 동시에 그는 전적으로 의지할 마음의 고향을 잃는다. 이 두 상실을 겪은 후 아오야마는 전과 다른 꿈, 전과 다른 인식을 갖게 된다.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던 아오야마의 꿈은, 대단한 사람이 된 후, 다시 ‘누나’를 만나겠다는 꿈으로 이어진다. 이는 두 가지 큰 의미를 갖는다. 먼저 사라진 누나를 만나는 것은 죽음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동생이 어느날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듯, 아오야마도 죽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만 동생의 눈물이 죽음의 인식이라면, 아오야마의 꿈은 죽음의 인정, 즉 받아들임이라는 점에서 더 성숙한 인식이라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삶의 끝에서 누나를 만나겠다는 말은, 삶의 과정에서 ‘누나’ 없이, 오롯이 홀로 달리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홀로서는 것, 그것이 어른의 조건이라면 아오야마는 영화의 끝자락에서야 처음으로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2. 다시 집으로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다 속 세계는 누나가 늘 꿈꿔왔던 고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다 속에서 펭귄 보트가 섬으로 들어가는 씬을 유심히 관찰한 관객들은 섬의 두 봉우리가 아오야마가 그토록 집착하던 ‘가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승우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가슴 모양의 섬’은 곧 어머니의 품이고, 완전한 안정이고, 마음의 고향이다. 누나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에서 아오야마는 드디어 마음의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그 고향은 곧 소멸할 것으로 예정되어있는 세계다. 여행이라는 것이 대게 그렇듯,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는 짧고, 그 세계는 여행이 끝난 후 마음속에서 꿈의 형태로 자리 잡는다. 돌아가고 싶은 세계, 돌아가야 할 세계로.

   

누나와 함께 섬으로 향하는 아오야마

 아오야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라져버린 고향에서는 ‘누나’가 기다리고 있고, 아오야마는 그 고향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지점에서 아마존 프로젝트와 펭귄 연구가 연결된다. 아마존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해낸 마을 하천의 구조는 원형이다. ‘바다’로 통하고 ‘바다’에서 다시 시작되는 순환구조다. 아오야마 앞에 놓인 길, 펭귄 하이웨이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누나’에서 시작해 누나로 향하는, 바다에서 시작해 다시 바다로 향하는, 고향에서 시작해 다시 고향으로 향하는.


 한차례의 소동 이후 다시 ‘펭귄 하이웨이를’ 달리는 아오야마는 여전히 들떠있고, 여전히 의지적이다. 에반게리온에서 써드 임팩트 이후, 스스로 아담이 되어버린 신지의 당혹스러운 표정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두 세계의 극명한 대조점이다. 아오야마에게 삶이란 자신이 떠나왔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행길이다. 반면 신지에게 남은 생은 망망대해 위의 구명보트처럼 아득하다. 펭귄 하이웨이의 경우 작품의 톤 자체가 가볍다보니, 상실 전후의 고뇌, 상실 자체의 당혹감을 제대로 표현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종말 이후의 걸음은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아예 걷지 못한 채 주저앉아있을 시간도 필요하다. 만약 종말 후유증에서 채 회복하지 못한 관객이 두 작품을 모두 본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에반게리온의 손을 들어줄 지도 모르겠다.


  3. 믿음에 관하여

 나쁜 것을 믿기는 쉽지만, 좋은 것을 믿기는 어렵다. 긍정적 믿음을 얻기 위해선 의지가 필요하다. 필자는 평소 부정적 믿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고, 죽음은 안 믿고 싶다고 안 믿을 수 있는 게 아니기, 삶은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런 믿음 없는 삶에 회의를 느껴본 적은 없지만, 감당하기 힘든 허무에 빠졌을 때 조용히 읊조리는 ‘긍정의 주문’ 정도는 있다. 지금도 펭귄 하이웨이 위를 발이 안보일 정도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아오야마가 좋아라 할 법한 문장들이라,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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