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관람이었다. 온몸이 으슬으슬했던 첫 관람 때에 비하면 훨씬 멀리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와 지금, 필자의 영화관은 조금 달라졌다. 과잉과 작위적 비극에 무뎌졌고, 어설픈 유머에 잘 웃게 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보게 된 것이긴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 잊지 못할 영화적 체험을 선사했던 이 작품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1. 닫힌 세계, 다른 역학
스크린은 두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면이고, 극장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는 마법의 공간이다. 스크린의 안과 밖의 두 세계는 손에 닿을 듯 가깝지만 절대 합쳐질 수 없다.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역학에 의해 움직이고, 따라서 다른 우주다. 바깥에 앉은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스크린 이라는 찢어진 우주의 틈 사이로 우리의 그것과 전혀 다른 역학 아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관음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때의 관음행위는 때때로 몰입상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에 몰입하는 순간 바깥세상의 역학은 작동하지 않는다. 두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스크린 속 세계 만의 고유한 역학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는 꿈을 꾸는 것과도 비슷하다. 꿈을 회상하면 이상한 점 투성이지만, 정작 꿈 속에서는 꿈이 꿈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현상 말이다. 그러나 관람행위가 언제나 몰입으로 이어지는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 관음은 분명 독점적 권력이고, 몰입을 동반하지 않는 관람이야 말로 이 절대적 권력을 최대한 행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눈을 부릅뜨고 영화 속 세계의 역학을 해체,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계 너머에서 분해한 세계의 모습은, 때때로 이질적이고 불편하다.
박찬욱의 영화에는 관객을 빨아들이는 기묘한 힘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온몸이 얼얼하고 찌릿한, 그러면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힘 말이다. 내 첫 번째 관람은 그 ‘기묘한 힘’이라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경험이었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점, 영화의 윤리성, 상징적 구조 등을 논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인물들은 극단적 아이러니로 내몰렸고, 폭력은 피로 물든 하천처럼 유려하게 흘러 다녔다. 이게 당시의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영화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 이상의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한방 먹었던 터라, 이번에는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팔짱을 낀 채 15도쯤 기울어진 삐딱한 자세로 스크린 앞에 앉았다. 다시 만난 ‘복수는 나의 것’은 첫 만남 때와는 사뭇 달랐다. 하긴, 영화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졌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기억보다 훨씬 작위적이었다. 아파 신음하는 누나와, 그 신음소리를 엿들으며 자위하는 남자들, 정작 그 소리를 들어야 할 류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한가롭게 라면이나 먹고 있는 상황. 이는 자연발생적인 아이러니가 아니다. 아주 악랄한 신이 자신의 피조물들을 괴롭히기 위해 기획한 못된 장난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영화 속 인물들은 속으로 신을 엄청 욕했을 거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고. 필자도 그 세계의 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박찬욱씨, 대체 왜 그러세요?
아이러니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보자. 영화 속 인물들의 결단과 시간은 언제나 엇갈린다. 류가 장기를 떼이고 돌아오자 기증자가 나타나고, 수술비를 위해 납치까지 감행했더니 누나는 자살해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말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아이는 죽어버렸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가려졌을 뿐이지, 따지고 보면 환경설정 자체는 코엔의 시리어스맨에 버금갈 만큼 악랄하다. 그러니까 박찬욱의 세계는 애초에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역학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아주 악덕한 창조주가 인물들을 괴롭히기 위해 기획된 세계, 결정적 순간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어긋나는 ‘아이러니 제 1 법칙’이 적용되는 세계다. 이쯤 되면 의문을 가질 만하다. 감독이 축조한 작위적 세계 속에서 정해진 파국 위를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물음을 좀 더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감독님, 이 영화 왜 만드셨어요?’
2. 이미지의 마법
잔뜩 비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필자는 아직도 이 영화를 사랑한다. 암시처럼 반복되는 이미지들과, 운명 그 자체에 대한 비유와도 같은 최후의 심판자들까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잔상처럼 웅얼거리게 되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1)붉은 쇳덩이와 차가운 물
영화의 초반부에, 류가 일하는 공장이 등장한다. 기계 속에서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들이 찬물속으로 날아들어 차갑게 식어버리는 장면을 카메라는 한참동안 응시한다. 별거 아닌 듯 하지만 이는 영화 전체를 포괄하는 핵심적 이미지다. 첫 번째 부검과 두 번째 부검에서 동진의 태도를 비교해보라. 혼수상태의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간 동진과, 류를 토막 내 봉지에 따로 담은 동진을 비교해보라. 인간으로서 동진은 결국 공장의 쇳덩이만큼이나 차게 식어버린 것이다. 이는 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련의 아이러니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류의 모습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린다. 그리고 그 파국의 길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빨간 옷을 입은 류는 결국 스스로 쇳덩이가 되어, 차가운 물 속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식어간다.
2)흐르는 물처럼
영화에서 흐르는 것은 물 뿐만이 아니다. 잇따른 불행 속에서 폭력과 죄악 또한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세차게 흘러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진의 딸이 물살에 휩쓸려 죽었다는 사실은 좀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있다. 류와 동진의 마지막 조우에서 동진은 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 착한 놈 인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이 대사만 보면 동진은 마치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억지로 류를 죽여야 하는 사람처럼 말한다. 동진에게 류를 죽이는 일은 흐르는 물살처럼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 영화가 그리는 거의 모든 악이, 폭력이 그렇다. 흐르는 것, 거스를 수 없는 것.
3)들을 수 없는 비밀
마지막에 영미의 조직원들이 등장해 동진을 죽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를 연상케 하는 무채색의 조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운명’을 집행하곤 유유히 사라진다. 갑자기 들이닥친 운명 앞에서 동진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진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동진은 자신의 배에 꽂힌 판결문을, 자신이 죽어야하는 이유를 보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보지만 각도 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3. 그래서, 진짜 왜 만드셨어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지의 유려함이나 연출자의 센스는 제쳐놓고, 복수와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본 영화의 화법이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가 창작자에 의해 작위적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폭력이 물처럼 흘러가는 과정이 감독의 개입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정말 이 영화가 복수에 대해 던지는 모든 말들은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결국 결정적 상황에서 이야기를 쉽게 전개시키고, 인물들의 당위성을 확보해주는 건 감독의 개입과도 같은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아이러니의 상황이라는 점이 찝찝한 응어리처럼 남았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완전히 매듭짓지 못했다. 아름답고도 기만적인, 완벽하면서 모순적인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장황하고도 허술한 글 끝에서 필자가 진짜 묻고 싶은 건 왜 영화를 만들었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질문이 아니다. 진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다. 꽤나 복합적인 의미에서의 물음이고,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머무를 것만 같은 물음이다. 복수는 누구껍니까? 감독님, 복수는 정말 누구의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