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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홍진 Dec 04. 2018

죄와 용서의 이야기, <영주>

 얼마 전 여야가 윤창호법을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론이 워낙에 거세다보니,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던 정치권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피해자의 친구들, 국민들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며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 ‘영주’가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이와 좀 다른 것 같다. 영화 ‘영주’는 범죄자 인권에 관한 논쟁 자체를 차단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속죄와 용서라는 민감한 아이디어를 던진다. 물론 분노의 시대에 용서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이 의도된 타이밍은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화가 정식 개봉한 이후에 크고 작은 논쟁들을 불러일으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주 포스터

 1. 어른아이


 주인공 영주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홀로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초반부터 영주가 겪어내고 있는 삶의 무게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고모는 집을 팔아버리라고 영주를 압박한다. 동생은 친구들과 PC방을 털다 검거되고,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받으려다 되려 가지고 있던 돈까지 날려버린다. 아직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을 나이, 남들은 대학가서 연애도 하고 술도 마실 나이에 부모님의 제사상 앞에서 혼자 울며 술잔을 비워야하는 영주의 처지는 그야말로 딱하다. 어른이지만 어른은 아닌 나이에, 어른의 역할을 부여받은 영주의 정체성은 관객에게도, 영주 본인에게도 모호하다. 이는 영화 초반 고모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주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아직 어리니 어른들 말을 들으라며 집을 팔라고 강요하던 고모는,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주에게 이제 성인이니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한다. 성년과 미성년 사이,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영주는 홀로 외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2. 용서받을 자격


 대출사기를 당해 마지막 남은 돈까지 잃은 영주는 결국 음주운전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가해자를 찾아간다. 그들이 시장에서 두부 가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주는 두부가게에 취직해 돈을 훔쳐 합의금을 마련하려 한다. (이후에 영주는,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얼마 뒤, 돈통의 위치를 확인한 영주는 곧바로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야밤에 두부가게의 내려간 셔터를 올리고 잠입해 미리 확인해놨던 곳에서 돈통을 찾아 뜯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셔터가 다시 올라가고, 사장님, 자신의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사장님이 술에 만취한 채 들어온다. 영주가 자신에 의해 죽은 그 사람들의 딸임을 모르는 만취상태의 사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주를 끌어안고 미안하다며 흐느낀다.


 이 장면은 엔딩과 함께, 영화 전체에서 가장 명징한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 중 하나다. 앞서 언급했듯, 사장의 속죄는 피해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물론 피해자가 맞긴 하지만, 사장은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아내의 태도를 보면 이는 더 명확해진다. 천주교 신자인 아내는 마치 스스로의 죗값을 갚듯, 주변에 사랑을 베푼다.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 영주이긴 하지만, 그들이 영주의 사연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들의 포용적인 태도가 영주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스로의 죄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베풀며 사는 것,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전하는 삶의 방식과도 같다. 모든 이는 죄인이니,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 죗값을 치라는 것이 그분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아닌가.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넘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믿음에 준하여 나름대로의 속죄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베푼 사랑이, 결국 영주에게까지 닿게 된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용서받을 자격을 논하는 것은 한편으론 웃기기도 하다. 용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 용서라는 것의 본질은 무엇이며 죄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용서받아야하는 자, 즉 죄인이 용서를 받기 위한 최소한을 굳이 따져본다면, 아마 사장님 부부의 태도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법률의 심판을 받은 죄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에 대한 죄의식을 가슴속에 품고, 조금이라도 더 포용하고, 더 나누려 한다면 공동체는 분명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뻔뻔함을 능력으로 치부하는 시대에 죄와 염치를 말하는 ‘영주’가 퍽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영주와 향숙

 3. 재림

 

 영주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능동적 움직임인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수동적으로 강요받은 움직임인 것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힘들다. 영주가 돈을 빌린 것도, 훔치려 한 것도, 두부가게 부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어쩌면 불가항력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그런 영주에게 영화는 끝자락에서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한다. 휩쓸리는 생을 주체적으로 끝낼 수 있는, 잔인하고도 능동적인 길을 말이다. 영주는 다리 위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긴다. 그리고 의지와 상관없이 침전하는 삶 속에서 마지막 추락을 상상한다. 그러나 영주는 결국 난간을 놓고 다시 걸어가기를 선택한다. 삶과 죽음 중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영주에게도, 영화 전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비루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마지막 발걸음은 자전거탄 소년의 엔딩과도 연결되는, 언뜻 진부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하나의 운동이자 부활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러닝타임 내내 탐구하던 죄와 용서라는 테마를 버리고, 부부에서 영주로 시선을 옮긴 것은, 종국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순례자로서의 인간을 담아내겠다는 카메라의 의지다. 이는 가해가 아닌 피해를 전시함으로써 계몽하고자한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론과도 일치한다.


 예수가 죽지 않고 부활한 것처럼, 영주는 결국 죽지 않았다.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와 세상 모든 죄 앞에 두발로 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당신의 오른손이다. 당신 앞에는 십자가를 짊어진 채 이 땅에 재림해 당당히 왼쪽 뺨을 치켜든 영주가 있다. 영주의 뺨과 당신의 가슴 중 당신의 오른손이 향할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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