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3부작으로 묶이곤 하는 린치의 영화 세 편을 이제서야 전부 봤다. 그 중 최근의 두 작품, ‘인랜드 엠파이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본지가 좀 됐고, ‘로스트 하이웨이’는 얼마전에야 겨우 손을 댔다. 정확히 언제 였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본 건 확실하니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로스트 하이웨이’로 역주행 하기까지 적어도 2~3년은 걸렸다고 보는게 맞겠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 박혀버린 린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여태껏 주저하게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영화 자체가 주는 공포감만을 이야기하는 건 물론 아니다. 영화 몇 편 보지도 않고 영화 좀 안다고 거들먹거리던 그때의 나에게 린치의 영화는 그 자체로 악몽이었다. 그때 무슨 용기로 ‘인랜드 엠파이어’를 린치 입문작으로 선택한 건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영화 이후로 한동안은 린치에 관해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뇌세포를 할애했었다. 분명 엄청난 걸 봤는데 그 엄청난 감흥이 말로 해명되지 않을 때 느끼는 진짜 공포감, 무력감을 한동안 달고 살았었다. 그의 에세이집 ‘빨간 방’을 읽은 후에야 그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 정도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3년이 지난 지금, 용기를 내 ‘로스트 하이웨이’를 꺼내든 내가 린치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만큼 성장했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세 작품 중 가장 명료(?)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린치의 세계는 늘 그렇듯 혼란스러웠고,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영양가 없는 몇 마디의 이야기 정도밖에 찾지 못했다. 그 조촐한 몇 마디라도 글로 정리하면서, 삼부작을 다시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길의 작은 베이스캠프로 삼아 볼 생각이다. 세 편을 다시 감상했을 때, 데이빗 린치라는 외계에서 떨어진 듯한 아티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발전된 이해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전제하고 가야 할 것이 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린치의 영화는 더더욱 답을 찾는 방식의 감상에 빠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애초에 명료하지 않다. 명료하지 않게 주어진 것을 억지로 명료하게 짜맞추려 하는 건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를 짜맞춰 원래의 얼굴을 찾으려는 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명료한 서사를 ‘만들어보는’ 것이 하나의 재미있는 감상법이 될 순 있겠지만, 어떤 이야기를 만든다 해도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애초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답이 없다는 ‘로스트 하이웨이’의 특성을 영화는 몇가지 장치를 통해 자체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빨간 방’은 그 중 가장 명료하게 ‘명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 속 장치다.
1. 빨간 방
린치의 에세이집 제목이기도 한 ‘빨간 방’은 다양한 층위의 함의를 담고 있다. 극장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꿈 속의 공간 같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꿈-망상-영화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흐린다는 점을 떠올리면 ‘극장’이라는 다소 단정적인 비유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도 있겠다.)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도 빨간 방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빨간 방처럼 보이는 공간이지만 말이다. 복도와 방 사이에 문이 달려있지 않고 그 사이를 붉은 커튼이 관통하는 이상한 집의 구조 덕분에, 프레드와 그의 아내가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 관객들에게는 마치 그들이 붉은 커튼으로 쌓인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드는 이 공간을 여러 차례 통과한다. 즉 극장을 여러 번 들락거린다. 그리고 이 들락거림을 카메라는 모호하게 포착한다. 극장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행위는 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행위, 망상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행위 와도 연결된다. 망상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을 모호하게 반복함으로써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음을 영화는 말한다.
2. 현실과 망상사이
이제 서사로 들어가보자. 현실과 망상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사의 맥을 잡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친 방식이긴 하지만, 일단 영화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자. 프레드가 중심이 되는 전반부와, 피트가 중심이 되는 후반부로 말이다.
전반부의 끝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프레드가 르네를 죽였다는 사실이다.(물론 이것조차 의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사실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파편화된 작은 이야기들이 있다. 의문의 남자는 프레드의 집 벨을 누른 뒤 딕 로렌트가 죽었다고 말한다. 프레드의 집 앞에는 의문의 비디오테이프가 놓여져 있고 그 비디오 속에는 프레드의 집의 내-외부가 담겨있다. 앤디라는 의문의 남자는 프레드에게 르네와 관련한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공포스럽게 생긴 남자는 프레드에게 자신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중 어떤 것이 망상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대신 어떠한 욕망이 프레드가 아내를 죽이게 만들었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프레드와 르네의 섹스씬이 주는 공허함, 르네와 앤디 사이의 이상한 텐션, 그러한 암시들이 주는 불길한 예감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접근은 우리가 현실에서 꿈-무의식을 읽는 방법과도 비슷하다. 프로이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파편화된 서사에 관해 할 말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암시들을 던지다 갑자기 막다른 길에 다다른 서사는,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탈주로를 만든다. 감옥에 갇혀 있던 프레드가 갑자기 피트로 바뀌면서 석방되는 것이다. 피트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옥에 갇히게 된 상황에 대해 어떠한 기억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전반부의 딕 로렌트가 등장한다. 누군가가 죽었다고 말한 그 딕 로렌트 말이다. 그리고 그 로렌트의 애인인 앨리스가 있다. 앨리스는 피트를 유혹한다. 둘은 섹스를 한다. 딕 로렌트가 목격한다. 둘은 사랑의 도피를 위해 앤디(여기서 앤디가 갑자기 다시 등장한다.)의 집을 턴다. 훔친 물건들을 팔기 위해 전반부의 ‘공포스럽게 생긴 남자’를 찾아간다. 그러곤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후반부에서 서사는 더욱 모호해진다. 프레드가 피트로 바뀌어 버린 시점부터 서사는 관객이 도달할 수 없는 지점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프레드의 심리에 대한 예감은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관객을 조여온다.
첫째, 프레드와 대비되는 피트의 비범한 성적 매력이 암시하는 모종의 열등감
둘째, 앨리스와 앤디, 그리고 에디(딕 로렌트) 사이의 관계
셋째, 앨리스-르네의 동질성 (실제로 한 배우가 이 둘을 동시에 연기했다.)
이 세가지 암시들 사이의 심리적 연결고리는 절대 느슨하지 않다. 도망치는 실재의 서사와는 반대로, 안으로 조여오는 심리의 서사는 후반부에 이르러 프레드의 정신에 대한 윤곽을 어느정도 포획하는 데 성공할 뻔 한다. 그리고 그때쯤 피트는 다시 프레드로 변한다. 그러곤 딕 로렌트를 죽여버린다. 여기서 질문, 그가 딕 로렌트를 죽인 것은 사실인가? 애초에 딕 로렌트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사실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향하더라도, 이 두 물음은 유효했을 것이다. 우리는 약 2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프레드-피트’의 윤곽을 어느정도 잡는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다시, ‘로스트 하이웨이’에는 어떠한 ‘진실’도 ‘정답’도 없다. 가장 핵심적인 물음 몇 개 만을 남겨놓은 채 결론이라는 막다른 벽에 다다를 때쯤, 영화는 급기야 제 스스로의 꼬리를 물어버린다. 이럴 수가!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완성한 이야기는 이제 어느 누구도 감히 해체할 수 없는 영원 반복의 미로가 되어버렸다. 가엾은 프레드는 그 속에 갇힌 채로 끝없는 도주의 나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요컨대, ‘로스트 하이웨이’는 내적으로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는 프레드의 도주극이고, 외적으로는 관객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서사의 도주극이다. 그리고 결국 프레드와 서사는, 절대 잡힐 수 없는 폐구조를 만듦으로써 영원한 도주에 성공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허우적댈 수도, 미로 밖에서 관조적 시선으로 길이 없는 미로의 기이함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시도도 진실을 찾아주지는 못한다. ‘로스트 하이웨이’에는 어떠한 진실도, 정답도 없다.
프레드와 르네, 둘 사이의 간격
3. 단절과 연결
마지막으로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 짤막하게 끄적여보려 한다. 영화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공간인 프레드의 집에는 방문이 없다. 즉, 모든 방과 복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쇼트 내에서 그 공간들은 철저히 분절된 형상으로 담긴다. 각 방을 담는 쇼트에서 출입 통로는 보이지 않고, 가끔은 벽을 쇼트의 칸막이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그 어떤 실내공간 보다 연결되어 있지만, 카메라에 의해 단절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은 영화의 쇼트-쇼트 연결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잦은 암전과 날카로운 편집점, 동선을 따라가지 않는 카메라워크는 각각의 쇼트를 파편화 한다. 그러나 이 쇼트들이 정말 그 형식처럼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미 서사가 아닌 심리로 매개되는 ‘로스트 하이웨이’의 이상한 연결감을 파악했다. 각각의 쇼트, 이야기 조각은 서로 동떨어진 듯 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어떠한 심리적 연결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명백히 꿈의 그것에 대한 모방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대상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그림으로써 꿈의 장면을 꺼내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면, 린치는 꿈의 파편성과 연결성의 모순적 성질을 차용함으로써 스크린에 악몽의 잔상들을 투사한다.
영화가 세계를 모방하면 모방할수록, 영화의 허구성은 도드라진다. 영화사의 많은 위대한 성취들은 이러한 본질적 허구성이라는 내제된 모순을 고민하는 데에서 출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브레송은 연출된 진실이 아닌 실제의 진실을 담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했고, 이는 21세기의 홍상수 에게까지 연결된다. 지아장커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연결함으로써 영화를 마치 현실 위에 들어앉은 환상처럼 다루었다. 그리하여 지아장커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라는 연출된 진실 대신, 연출된 환상 아래에 깔린 실제의 진실을 본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살바도르 달리는 미술의 전방에서 싸우던 초현실주의를 영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실험을 감행한다. ‘로스트 하이웨이’로부터 70년 전, 그때도 사람들은 길을 잃었었다. ‘안달루시아의 개’가 남긴 꿈에서 막 건져낸 듯한 이미지들은,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체되지 않고 오랜 시간을 견뎌냈다. 애초에 진실인 척 한 적이 없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속의 진실을 찾으려 지독하게 달려들었고, 애초에 진실이 아니기에, 어떠한 진실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70년 전의 그 악몽이 고스란히 린치에게로 건너와 새로운 악몽을 낳았다. 더 정교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래된 물음을 다시금 던지는 린치가 나는 아직 두렵다. 다시, 기꺼이 그의 악몽에 빠져 허우적댈지, 먼 발치에서 관조할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린치의 세계를 망가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나는 아직 린치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