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작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설레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가 어떤 흐름에 속해 있는지 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영화의 위치와 지향점, 영화적 성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나는 마음에 마구 휘갈겨 써낸 글을 며칠 뒤에 다시 읽고서, 부끄러움에 혼자 이불을 걷어 찼던 적도 없지 않았다. 기생충의 경우에도 그렇다. 내가 이전에 써낸 글 속에서 나는 명백히 길을 잃었었다. 피상적인 아이디어 몇 개만 던졌을 뿐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 글재주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태도의 문제가 컸다. 나도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 글을 써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쓴다. 제발 이번에는 제대로 쓰길 스스로에게 부탁하며 먼저 이전 글을 링크로 남긴다. 읽지 않아도 이번 글을 읽는데는 무방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두가지 결이 있다. 장르영화의 결과 작가주의 영화의 결. 봉준호의 전작 들에서 이 두 결은 상호 교차하며 영화를 관통했다. 기생충은 살짝 다르다. 전반부는 장르의 결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도드라진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그 장르성이 확 벗겨진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볼 때는 마른 침을 삼켜가며 봤지만, 막상 극장을 나와 돌이켜봤을 때 어딘가 조악하다는 인상이 든다면, 그건 아마도 이 급변하는 ‘결’ 때문일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통용되던 것들이 후반부에선 죄다 미끄러진다. 전반부에선 드러나지 않던 표정들이 후반부에서는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그런데 이는 ‘기생충’이 가지는 영화적 특성 중 하나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꽤나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후반부의 바뀌어 버린 톤에 의해, 전반부의 비현실적 전개가 실질적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가 비현실적이라는 것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완전히 진실한 영화는 애초에 없다. 그러나 어느정도 까지의 비현실성을 전제할 것인가는 관객과 사전합의가 되어야 한다. 예컨대, ‘올드보이’를 평가할 때 누구도 현실성을 말하지 않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경우, 현실의 정교한 반영 유무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다크나이트’에서는 허용되는 수준의 장르적 관습들이, ‘덩케르크’에서도 똑같은 수준으로 허용되지는 않는다. 이는 영화의 ‘세계관’, 혹은 ‘영화관’의 문제이고,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 그 세계를 관통하는 대전제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의 문제다. 그러니까, 파워레인저가 변신하는 동안 악당이 공격해버리면 그건 현실성을 획득한 게 아니라, 설정을 파괴한 것이 된다. 기생충의 경우에, 케이퍼 무비의 한 시퀀스를 보는 것 같은 전반부의 비현실적 ‘아다리’와, 후반부의 현실적 ‘삑사리’는 하나의 세계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질감이다. 이 화법의 괴리에 대해서는 적절한 해명이 필요하다. 특히 영화를 둘러싼 대부분의 논쟁들이 본질적으로 이 간극에 기인하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는 더더욱 그렇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속에서 얼마만큼의 현실을 이야기해야 할 지 난감해 하고 있다. 영화가 현실, 혹은 관객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지가 불명확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내재하고 있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간극을, 기택네의 관점을 빌려 꿈과 현실의 괴리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전반부가 상승의 쾌감을, 후반부가 하강의 지난함을 보여줌으로써 일장춘몽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반부의 비현실성이 기택네 가족의 시점으로써 정당성을 부여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사실 한가지는, '기생충'은 그 어떤 경우에도 특정 인물에게 이야기를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카메라는 전지적 이야기꾼의 시점을 영화 내내 유지한다. 시점숏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고, 인물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버닝’이나 ‘로스트 하이웨이’처럼 특정 인물에게 시점이 부여된 경우에는 몰라도, ‘기생충’의 경우에 전반부의 비현실적(혹은 장르적) 톤을 상승에 대해 특정 인물이 가지는 환상을 가시화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뒤에서 세게 내려쳤다. “아, 수석!”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오브제, 유일하게 아래에서 위로의 시점숏을 부여 받은 기묘한 존재, 명백히 인물들과 다른 층위에 존재하는 이 수석이야 말로, 같은 층위에서 두 결의 세계가 충돌하는 이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힘을 중심으로 영화를 읽으려 했던 내 시도가 무참히 좌절된 것은, 수석이 가지고있는 막강한 힘을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수석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기택네는 상승할 의지가 없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온가족이 모여서 피자박스를 접는 상황을 비관하지 않았다. 애초 설정에 따르면 두 가족은, 현실에서의 두 계층이 그렇듯, 실제로 만날 일이 없다. 그러나 마법이 걸린다.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똑바로 위를 쳐다보는 수석이 굴러들어오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마법은 영화의 전반부가 띄고 있는 비현실적 특성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수석이 위를 올려다볼 때 기우의 눈빛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보인다.) 이 쇼트 하나로 인해 우리는,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수석의 시점으로도, 홀린 기우의 시점으로도, 전지적 시점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장면이다.
기우는 부잣집에 과외선생님으로 입성하고 뒤이어 가족들도 차례대로 저택에 발을 들인다. 그들의 상승은 ‘수석’으로 대변되는 복합적 층위의 힘에 의해 무탈하게 진행된다. 수석은 단순히 인물들의 상승 욕구를 환기시키는 것을 넘어서, 제작자의 층위에서 영화 속 세계를 통제, 편집하는 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이 모두 집에 들어오고, 진짜 주인들이 집을 비우는 순간까지 수석의 힘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2. 힘의 충돌
그러나 그들이 정상에 도달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비는 항상 새로운 국면을 유도하는 또다른 마법처럼 작용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기생충’에서도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자 수석의 힘은 약화된다.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수석의 힘과 달리, 빗물은 중력에 몸을 맡긴 채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질주한다. 두 힘이 서로를 노려보며 충돌을 준비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이때 영화는 새로운 공간을 개봉함으로써 또다른 힘의 결을 만들어낸다.
지하실의 인물들은 ‘수석’의 힘을 빌려 올라온 기택네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원래 그들의 몫이었던 기생의 자리를 탈환하려 한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빗물의 힘’이 작용하려는 와중에 아래에서 당기는 근세와 문광의 힘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러곤 세 갈래의 힘이 싸운다. 그러나 하강의 힘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기택네 에게는 결국 지하실, 또는 반지하라는 두가지 선택지밖에 허락되지 않는다. 치열한 난투 끝에 그들은 문광네를 지하실에 가두고선, 처연하게 반지하로 흘러내려간다. 그러나 탄성이 있는 모든 물체는 바닥에 닿으면 튀어 오른다. 기정이 변기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 때,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빗물에 대한 반작용으로 변기에서 탁류가 뿜어져 나온다. 이 상승과 하강의 운동이 한 쇼트에 응축되는데, 영화를 지배하는 두 상충되는 운동의 충돌은 영화 내적으로, 외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선 안될 사실, 추락한 건 기택네 만이 아니다. 근세도 추락했고, 그도 나름대로의 탄성을 응축시킨다.(이 즈음에서 두 지하가 교차편집으로 처리되는데, 이때 두 공간이 영화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인물의 감정적 동질성보다는, 흐르는 힘의 동질성에 기반한 연결이 아닐까 싶다. 이 장면의 폭발력은 곡성의 교차편집만큼이나 훌륭하다.)
3. 다시, 수석으로
반지하에 빗물이 들어찼을 때, 수석이 물 위로 떠올라 기우에게로 왔다.(이때 기우가 수석을 내려다봄으로써 둘은 완전히 연결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돌아왔지만, 수석의 힘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수석은 반격을 준비한다. 그들이 내려온 지난한 길을 잊었다는 듯, 기우네는 아무런 탈도 없이 다시 저택에 입성한다. 그런데, 다시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간 기우가 갑자기 아래를 바라본다. 지하실의 부부가 못내 거슬린다. 그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 말로 기우의 가장 큰 실수이자 파국의 트리거다. 수석은 언제나 위만을 본다. 수석을 들고 아래로 내려가는 건 수석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것이다. 상호간 시선교차를 통해 연대를 확인했던 기우와 수석이었지만, 기우가 수석을 안고 아래로 내려 감으로써 둘의 연대는 종결된다. 수석은 기우의 머리를 가차없이 내려친다. 그리고 이때, 지하실에 묶여 있던 탄성이 방출된다.
방출된 탄성은 정원에서 연쇄폭발을 일으킨다. 기택이 박사장을 죽인데에는 어떠한 합리적 이유도 없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이 류를 죽인 것처럼, 기택도, 근세도, 수석으로부터 촉발된 어떤 힘이 흐르는 과정에서 그 힘에 종속된 인물들일 뿐이다.(클로즈업된 기택의 표정과 동진의 표정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요컨대, 이 영화는 수석에서 시작해 수석으로 끝나는 영화다. 영화의 모든 영화적 ‘사건’은 수석으로부터 촉발된 뒤, 수석의 퇴장으로 종결된다.
앞선 글에서 나는 ‘괴물’의 힘과 ‘기생충’의 힘을 연결시키려 했다. 그러나 틀렸다. 두 영화에서 힘은 전혀 다른 최후를 맞이한다. ‘괴물’의 힘은 영화 속 괴물이 죽은 뒤에도 잔상처럼 남는다. 괴물의 파괴적 운동, 그 위력감은 잊기 쉽지 않은 류의 것이다. ‘괴물’은 그 힘을 통해 영화 밖의 세상을 ‘말하게’ 했다. ‘기생충’의 경우는 다르다. 이 모든 사건을 일으켰던 수석이라는 미지의 힘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영화 속 세계에는 어떠한 힘도 남아있지 않다. 기우의 의지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력하게 들린 것은 실제로 영화 내에 남아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무력감. 많은 관객들이 영화가 주는 무력감에 대해 말했다. 그것에 감탄하기도, 원망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요컨대 '기생충'은 힘의 부재로써 세상을 '말하게' 하는 영화다. 설국열차, 옥자에서 거대한 비관 끝에 결국 한 줌의 희망을 말했던 봉준호의 불씨가 이제 꺼져버렸다.
그가 만들어낸 이 무력의 폐곡선을 비판할 수 있다. 그의 무책임함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순간에도 우리는 결국 '기생충'으로 부터 시작된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무력하게 끝이 났지만, 그것이 우리를 목소리 내게 한다면, 정녕 그것이 무력한 영화인가?'기생충'을 보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은 분명 평소보다 요란스러웠다. 다시 정리해야겠다. '기생충'은 힘의 부재로써 세상을 '말하게'하는 영화다. 즉, 힘의 부재로써 스스로의 힘을 증명하는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응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