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총각과 의령 아가씨

by 수연길모

삼정 송림 맨션에 이사 가서는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셋째 언니와 둘이서 화장실 앞 작은방에서 지냈다. 양금석을 닮은 셋째 언니는 어릴 적부터 먹성이 좋아 통통했다. 어느 날 언니랑 나란히 벽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는데 언니는 좋아하던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손을 한 번도 쉬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박자에 맞춰 입으로 새우깡을 쏙쏙 넣었다. 마치 인간 새우깡 흡입기라도 된 듯이 정확히 딱 한 번 씹고 삼키고 있었다. 언니의 새우깡 먹는 기술은 여중생이었던 나의 새우깡에 대한 욕망마저 잠재울 정도로 놀라웠다.


그런 토실이 언니를 누가 놀렸는지 어느 날부터 언니는 살을 빼기 위해 곡기를 아예 끊어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언니는 말 그대로 뼈만 남게 되었다. 가족들의 쇼크와 걱정과는 달리 본인은 너무도 만족해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장에 큰 탈이 났기 때문이다. 얼굴에 기미가 꺼멓게 끼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위내시경까지 하게 되었다. 서면 내과에서 지어온 약과 함께 아버지는 자갈치 시장 근처에 있는 지인이 운영하는 약재상에 가서 화분(花粉)을 지성스럽게 사다 셋째 딸을 먹였다. 아버지의 정성으로 언니의 위 건강은 곧 회복되었고 언니의 살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큰오빠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언니는 오빠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침 오빠 회사 옆에 에어로빅 센터에 다니면서 언니는 건강하게 살을 빼게 되었다. 그리고 미용실을 옮기면서 원장님의 권유로 언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쇼트커트에서 어깨까지 긴 머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로써 셋째 언니의 외모의 황금기가 탄생하였다. 그러던 중 몇 명 남성들의 구애에도 다 퇴짜를 놓던 언니는 때마침 회사 절친의 시동생을 소개받게 된다. 언니는 맞선을 다녀온 뒤 엄마한테 싫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나 그 남자 싫어! 그 남자 대머리 더라니까!” 언니가 말했다.

“대머리라고? 대머리가 뭣이 어째서? 이덕화 봐라. 이것아. 대머리여도 가발 쓰고 돈만 잘 벌잖냐. 사람 속만 좋으면 괜찮애. 괜찮애. 더 만나봐라잉?”


깔끔이, 변덕쟁이, 토실이였던 언니는 또 엄마 말은 잘 들었다. 그렇게 몇 번 더 만나고 대머리 총각과 결혼 날짜를 잡았다. 결혼 전 아버지 회갑 잔치에 인사를 온 형부는 머리숱만 조금 아쉽지 키도 크고 따뜻해 보였고 눈빛에 총명함이 빛나는 훈남이었다. 이로써 큰 사위는 오 서방, 둘째 사위는 권 서방 그리고 셋째 사위는 송 서방이 되면서 사위들의 성이 하나 겹치지 않은 덕분에 엄마는 헷갈리지 않고 형부들을 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셋째 언니를 시집보내기 위해서 끈덕지게 계를 부었다. 그리고 계주에게 1번을 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언니 결혼식에 맞춰 8백만 원 정도를 손에 쥐었다. 그 당시 막내 형부는 수원 누나네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와 언니는 수원에 가서 혼수 준비를 했다. 수완 좋은 형부 누나는 남동생의 결혼을 위해 송탄에 26평 아파트까지 장만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신부가 혼수를 채워야 하는데 엄마가 가진 돈에 비해 집이 지나치게 넓은 게 흠이었다. 가구점을 하던 둘째 형부에게 싸게 혼수 가구를 했지만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동수원 쪽으로 가서 그릇을 고르는데 저렴한 가격만 보고 사 온 그릇들은 집에 와서 보니 깨지고 조금씩 금이 간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본 형부 누나는 잔소리나 눈치 주는 것 하나 없이 엄마가 미처 장만하지 못한 커튼에 언니 옷까지 사주시며 신혼살림의 빈틈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셋째 언니는 내가 대학 2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던 꽃샘추위가 맵던 3월에 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 산수를 못 한다고 귀에서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해댔고, 나의 첫 생리가 나왔을 때 식구들 몰래 뒤 베란다로 나를 데리고 가 생리 교육도 해주었다. 대학을 들어가서는 허구한 날 술 마시고 갈지(之)자로 집에 들어가면 언니의 구타가 기다리고 있었고, 언니가 새 옷을 사면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언니의 새 옷을 먼저 입고 학교에 갔다. 그렇게 집에 가면 또 언니에게 사정없이 맞던 나날들이었다. 나는 언니가 빨리 시집가 버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언니 결혼식 때 울지 않은 사람은 나와 엄마였다. 처음으로 아버지는 셋째 딸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렸고, 둘째 언니는 동생 결혼식장에서 주책없이 목놓아 울었다. 그런데 엄마는 울지 않아 딸들에게 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또 울지 않았던 나는 언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나만의 방에서 불을 끄고 누웠다. 맨날 양팔을 위로 올리며 만세 부르며 자는 언니가 없어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곧이어 어둠 속에 홀로 누워서야 언니가 다시는 이 방에서 나랑 잘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뒤늦게 엉엉 울었다.





삼정 송림 맨션에 이사 온 후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큰오빠는 사업을 시작했다. 부산 화승 실업에 운동화 아웃 솔(outsole:신발 바닥 밑에 붙어 있는 창. 땅바닥에 닿는 부분을 이른다)을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를 차리게 되었다. 신 모라동에 1층도 아니고 지하도 아닌 곳에서 직원은 우리 셋째 언니, 작은오빠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하숙하던 오빠 고향 친구 무환이 오빠 외에 직원이 3, 4명이 더 있을 정도로 꽤 규모 있게 시작했다.


큰오빠는 화승에 납품하면서 생산관리과에 참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숫기 없는 오빠는 마침 생산관리과의 오빠와 동갑이었던 과장에게 그 아가씨와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는 의령 출신으로 날씬하고 뽀얀 얼굴이 고왔고 일도 야무지게 했다. 큰오빠는 가난해서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어릴 적 명석하단 소리를 들었다. 허연 얼굴에 서구적인 또렷한 이목구비로 인물은 빠지지 않으나 어릴 적 심부름도 둘째 언니를 앞세워 가야 했을 정도로 유약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 이후 데이트는 계속되었고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의령 아가씨도 큰오빠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의령 아가씨네 집에선 오빠가 큰아들에 동생들이 줄줄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다. 특히 의령 아가씨 아버지는 결혼 전날까지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 아버지의 반대도 의령 아가씨의 큰오빠에 대한 사랑을 꺾을 순 없었고 그 의령 아가씨는 엄마의 첫 며느리가 되었다.


엄마는 없는 집에, 그것도 동생들이 바글바글한 장남에게 시집오겠다는 처자만 있다고 해도 감사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령 사돈댁은 우리 집보다 사는 형편이 나아서 부농에 가까웠다. 그때는 큰올케 언니가 오빠에게 과분한 사람인 것을 큰오빠도 우리도 알지 못했다. 과분하다는 것은 꼭 경제력만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빠에겐 없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단박에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해결책을 위한 빠른 판단력 그리고 연골이 닳도록, 발톱이 빠지도록 일하는 근면함이 언니에겐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시련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언니가 시어머니와 같이 바위처럼 가족을 지켜낼지 그땐 아무도 몰랐다. 언니의 그 진면목은 잔인한 시간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집에서 도망치듯 어린 나이에 결혼한 첫째, 둘째 언니에 비해 큰오빠는 서른셋이란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엄마는 다른 자식들의 혼인 때와 마찬가지로 결혼에 호의적인 의사만 표현할 뿐 금전적으로 오빠를 도울 수도, 며느리와 연락해서 적극적으로 결혼 준비에 훈수를 둘 수도 없었다. 그즈음 50대 중반을 넘어서던 엄마는 공장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만 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에 셋째 언니가 결혼하고 10월에 큰오빠가 결혼했다. 신혼살림은 화명동 18평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올케언니의 깔끔한 성격 덕에 살림은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어린 시동생들이 놀러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밥상을 차려주던 새색시 올케언니가 생각난다. 좁은 아파트였지만 신혼의 단꿈을 꾸던 화명동 집에서 얼마 살지 못했다. 화승 실업이 부도가 나면서 큰오빠의 사업도 끝이 났기 때문이다. 신혼집도 처분하고 큰오빠 부부는 삼정 송림 맨션 나동 310호로 꾸역꾸역 들어오게 되었다.


큰 올케언니는 삼정 송림 맨션에서 첫 딸을 출산 후 아이를 엄마한테 맡기고 보험 판매일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올케언니는 둘째를 갖게 되었고 오빠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 둘째 아들을 낳았다. 부도로 돈을 막지 못하고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되자 큰오빠 부부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부산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귀여운 애굣덩어리 채린이는 24개월이 안 되었고 잘생긴 포동포동한 승환이는 백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큰오빠네가 부산을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어쩌꺼나. 어쩌꺼나. 저 어린것들을 어쩌꺼나.” 하며 엄마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파트 뒷길로 내려가던 큰아들 내외를 눈물로 보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을 두고 가야 하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놓인 큰오빠와 며느리를 엄마는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타들어 가는 가슴만 뜯었다.


큰오빠의 사업 부도로 13년 동안 살았던 우리 집 삼정 송림 맨션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엄마는 또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젠 엄마에겐 자식보다 더 귀한 손자, 손녀가 품에 있었다.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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