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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n 12. 2024

가장 색채로운 피해자

 올해 들어 ‘용감한 형사들’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 요약본 등과 같은 유튜브 범죄 콘텐츠에 푹 빠지게 되었다. 치밀한 범죄 분석과 조마조마한 범인을 잡는 과정 그리고 공권력이 닫지 않는 그 회색지대에서 절규하는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점점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알 저알(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만든 유튜브 채널)’의 영상 업로드 알림이 울렸다. 제목이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 씨를 모셨습니다’였다. 그 사건은 ‘묻지 마’식 범죄며 잔인한 CCTV 장면이 유명했는데 그 피해자가 나오다니 심각하고 무거우리라 예상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김진주는 내가 생각한 강력범죄 피해자가 아니었다. 음성 변조에 보복이 두려워 잔뜩 움츠린 피해자를 상상했는데 그녀는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를 했을 뿐 통통 튀는 목소리로 상큼 발랄한 20대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김진주’라는 이름은 피해자의 필명이었는데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라는 책을 냈다고 했다. 심각할 법도 한데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사건의 정황과 그간의 지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22년 5월 22일 새벽 5시 부산 서면에서 한 여성이 혼자 핸드폰을 보며 걷고 있다. 뒤에는 15m쯤 간격을 두고 여성을 쫓아오는 남성이 있다. 그는 여성이 멈추면 몸을 숨기며 서 있다가 여성이 다시 걷기 시작하면 뒤를 쫓는다. 

  여성이 오피스텔 현관에 들어서자 고장 난 현관문을 통해 남성은 유유히 들어와 고개를 들어 CCTV 위치를 확인한다. 이윽고 여성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남성은 여성의 후두부를 돌려차기로 1회 가격했다. 이후 여성이 건물 벽면에 머리를 세게 부딪혀 쓰러졌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 다리를 뻗었다. 남성은 주먹으로 여성을 가격하려다 멈칫하더니 여성이 꿈틀거리자 바로 핸드폰을 빼앗은 뒤 4회 더 발로 머리를 폭행했다. 이내 여성이 의식을 잃고 몸이 굳은 채 기절하자, 남성은 한 차례 더 여성의 머리를 발로 내려찍었다. 

  그 후 그는 여성을 어깨에 둘러메고 CCTV가 없는 사각지대인 건물 1층 복도 비상구 쪽으로 향했으나 비상구는 잠겨 있었다. 그가 급하게 향한 곳은 배너로 가려진 비상구 문 앞이었고 약 8분이란 시간이 흐른 뒤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구두와 가방이 떨어지자, 소지품들을 챙겨 도주했다. 모든 장면이 CCTV에 녹화되었고 이 여성이 바로 김진주였다. 

  김진주는 이상 동기 범죄(‘묻지 마 범죄’라는 표현은 본래 공식적으로 합의된 표현은 아니다. 이상 동기 범죄나 ‘무차별 범죄’가 맞는 말이다.)로 인해 피를 흘리며 배너 뒤에 쓰러져 있었고 입주민에 의해 발견되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16주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외상성 두개내출혈, 두피의 열린 상처, 뇌 손상, 영구 마비가 우려되는 우측 발목의 피해가 컸다. 여기에 해리성 기억상실 장애까지 얻어 사건 발생 후 입원까지 2~3일간의 기억이 없었다. 영구 장애를 입을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과는 달리 입원 한 달 만에 오른쪽 발가락이 움직이는 기적이 일어났다.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돌아온 6월 4일을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6월의 탄생석인 ‘진주’로 필명을 지었다. 그런데 입원 한 달 때쯤 되었을 무렵부터 항문 출혈이 시작됐다. 항문 외과 의사는 입원을 오래 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무심하게 진단했다. 


  김진주는 똑똑하고 높으신 분들이 사건을 잘 처리하리라 생각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형사사법포털(PICS)에서 사건 진행 상황을 보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응급실 비용이 2백만 원이 나오고, 중간 정산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는 현실과 산더미 같은 약을 먹어도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황보다 그녀를 더 좌절케 한 것은 피해자가 사건 열람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사법부는 피해자 보호와 알 권리를 보장하기보다는 가해자 처리에 집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김진주는 형사재판 수사 기록과 증거 열람을 위해 민사소송을 해야 했다. 

  김진주는 검사에게 1,268장의 재판 기록 넘겨받은 후 가해자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이현우’였고, 1992년생으로 경호업체 직원(용역 깡패에 가깝다)이었으며 이미 전과 18회에 달했다. 20대 초반에는 10대 성매매 사기단 사건의 리더로서 피해자들에게 흉기를 사용한 폭력 및 물고문 등을 자행해 이미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2020년 대구 공동 주거침입으로 2년을 복역한 후 출소 3개월 만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 만성적 범죄자였다. 

  재판 전 수사 검사와의 면담에서 이현우가 밝힌 범죄 동기는 ‘피해자와 길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였다. 그래서 그녀를 쫓아가서 그런 짓을 했다고 증언했다. (재판 때 공개된 CCTV에서 그의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성폭행에 관한 의도를 물었을 때도 여자 친구가 있는 자신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고 피해자의 바지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정신을 잃어서 뺨을 몇 차례 때렸다고 진술했다

  며칠 뒤 기가 막힐 일이 일어났다. 기록 열람을 위해 이현우에게 제기했던 민사소송으로 인해 김진주의 주소가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구치소 동기에게 그녀의 주소를 달달 외우며 나가면 아예 때려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심 재판일이 되었다. 그날 처음 김진주는 자신이 다리가 마비될 정도로 짓밟히고 있는 것을 CCTV 화면으로 처음 봤고 8분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해자 최초 발견자에 의하면 발견 당시 상의가 올라가 복부가 보였고 바지 버튼과 지퍼가 열려있어 체모가 보였다고 한다. 김진주의 언니가 병원에서 처음 본 동생의 모습은 속옷이 오른쪽 종아리에 걸쳐져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당시 피해자의 옷이나 사건 발생 장소 어디에도 가해자의 DNA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했고 성폭행의 정황이 명백했음에도 조사하지 않았다. 

  또 그녀는 재판장에서 이현우의 도피를 도운 여자 친구 지현 씨를 보았다. 지현 씨는 공개된 사건 CCTV를 보고 매우 놀랐는데 그 모습을 보며 김진주는 지현 씨가 자신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이현우의 여자 친구는 그가 단순 폭행 사건이 있었다며 말했는데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짓밟은 남자친구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김진주의 증인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이현우는 욕으로 가득한 편지로 지현 씨를 협박했다. 

  1심 후 가해자가 받은 형량은 징역 12년이었다. 생각보다 낮게 나온 형량의 원인은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진주는 분노했다. 피해자인 자신에게 반성문을 보내지도 않았고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판사가 마음대로 형량을 줄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심 재판 후 더는 재판부를 믿을 수 없었던 김진주는 공론화를 결심했다. 1,268장의 재판 기록을 양면 복사를 해서 구멍을 일일이 뚫어 5kg 캐리어에 넣고 다녔다. CCTV가 없는 곳은 불안해서 갈 수 없었지만, 법원만큼은 안전하다고 느꼈다. 매일 같이 법원에 나가 재판에 참여해서 범인들의 심리와 판사들의 성향도 파악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요란해지기로 마음먹는다.


  가장 먼저 네이트에서 운영하는 개방형 게시판 네이트판에 ‘12년 뒤에 저는 죽습니다’라는 글을 올리자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 몇몇 기자들이 그녀의 글을 기사로 쓰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광고 PR을 전공한 김진주는 사람들이 사건을 쉽게 외우고 파급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네이밍’이 필요함을 느꼈다. 고심 끝에 JTBC 이호진 기자에게 ‘서면 돌려차기’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이를 써서 기사가 나가자 사건을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JTBC 뉴스와 사건 반장, MBC 실화탐사대와 같은 공중파 프로그램에서부터 인지도가 높은 사건 탐사 유튜브 채널에도 ‘서면 돌려차기’를 알리고 싶어 했다. 

  이 모든 것은 ‘그것이 알고 싶다’(이하 ‘그 알’) 출연으로 가는 필수 과정이었다. 32년이라는 역사가 말해주듯 ‘그 알’은 국내 탐사 프로그램 중 단연 높은 시청률과 인지도를 자랑한다. 조폭 두목, 살인범 심지어 사이비 종교 단체마저 두려워하는 것은 경찰도 검찰도 아니라 ‘그 알’ 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알’은 가해자에겐 위협적이며 피해자에겐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그녀 또한 ‘그 알’에 제보를 했지만, 처음에는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면 돌려차기’가 뉴스와 유튜브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던 2심 첫 공판이 끝날 무렵 ‘그 알’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알’은 피해자와 인터뷰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친다. 김진주는 ‘그 알’ 피디와 여덟 시간 동안 인터뷰하고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를 판단한 뒤 제작을 마쳤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방송 여부는 방송국 내 상부의 승인이 떨어져야 한다. 김재환 피디는 윗선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2023년 4월 8일 방송 결정이 떨어졌다. 

  김진주는 언니와 함께 방송을 봤다. 방송에서는 2심 첫 공판에서 다뤄지지 않은 청바지 엉덩이 부분에서 가해자의 DNA가 검출됐다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리고 그녀를 가장 황당하게 만든 것은 항문 외과의의 진단이었다. 입원 당시에 의사는 항문 출혈이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한 것이라고 했지만, 방송에서는 성폭행의 흔적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일반적인 항문 파열의 경우 6시 방향이나 12시 방향으로 일정한 패턴을 보이지만 성폭행의 경우는 다발성으로 나타나는데 김진주가 이에 해당하며 성폭행이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2심 첫 공판에서는 성범죄와 관련돼 조사는 안 된다고 했는데, 방송 후 DNA 재감정을 재판부가 허락했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난 뒤 사법기관 관계자들의 태도가 바뀌는 모습을 보고 범죄 피해자들이 왜 그토록 애타게 언론을 찾는지 김진주는 이해할 수 있었다.

  2023년 9월 21일 대법원은 이현우에게 ‘성폭력처벌법 제15조, 제9조 제1항에서 정한 강간 등 살인의 미수죄’로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또 10년간 정보통신망 신상 공개, 10년간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관련 기관 취업 제한,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현우는 김진주를 포함해서 전 여자 친구, ‘그 알’ PD에게까지 협박 편지를 보내서 형량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서면 돌려차기’ 사건이 일어난 후 1년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김진주는 청문회에 나가 자신이 겪은 범죄 피해자의 열악한 현실을 토로했고, ‘대한민국 범죄 피해자 커뮤니티’를 결성하여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 사건 공론화 방안과 향후 대응 등을 돕는 일과 범죄 피해자 지원책 간구를 위해 싸우고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폭행이나 범죄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밤늦게 다녀서는 안 된다, 짧은 치마를 입어서 안 된다 등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이젠 내 딸에게도 비슷한 맥락의 잔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를 당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누구에게도 들은 적은 없었다. 내가 범죄자에게 범죄 대상자로 정해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우리는 범죄 발생 이후 삶에는 무관심하다. 

  우리가 심각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해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야 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숨겨진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과 악몽으로 재현되는 그날의 고통은 알지 못하지만, 김진주를 통해서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끔찍한 범죄를 겪고 난 뒤 타인을 도우며 외상 후 성장을 선택했다. 범죄는 김진주의 빛을 잃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색채로운 피해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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