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릭랜드와 이반에 관하여
한 남자가 살림이라고는 의자와 침대밖에 없는 허름한 골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내와 자식을 떠나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있는 이 시간이 황홀하다. 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고 동료들과 신나게 카드 게임을 하고 있다. 아내의 잔소리도 돈 걱정도 없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이 두 사람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이다.
『달과 6펜스』는 1919년 서머싯 몸이 14년 동안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썼다. ‘달’은 영혼과 관능, 원초적 세계를 암시하고 ‘6펜스’는 영국에서 가장 낮은 화폐 단위로 돈과 물질의 세계, 세속적 가치를 가리킨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파리로 떠난다. 아내와 주변인들은 바람이 나서 애인과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40살의 나이에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갔다. 한동안 파리에서 종적을 감췄던 그가 향한 곳은 타히티였다. 여생을 보내기 위해 그곳에 간 스트릭랜드는 나병에 걸린다. 죽기 1년 전 시력까지 잃었던 그는 집안 모든 벽에 대작을 그렸지만, 사후 그의 유언대로 작품과 집은 남김없이 다 타버린다.
1886년 출판된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58세에 완성했다. 종교적 사상과 죽음에 관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 인간이 죽어갈 때의 심리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반은 45세의 남자다. 고위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고, 학창 시절 영특하고 예의 바르며 사교성도 좋았다. 그는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승진 가도를 달려 고위 법조인이 되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이반의 생활신조는 “쉽게, 즐겁게, 점잖게”였다. “자만심을 채울 수 있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추종하는 것”이 판단기준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상류사회 일원이 되기 위한 응접실 꾸미기였다. 그날도 응접실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창틀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친다. 가벼운 부상으로 시작된 통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의사도 어떤 명쾌한 의견 없이 형식적인 진찰만 할 뿐이다. 불쾌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급기야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예감한다. 이반은 가족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소파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한다.
두 남자의 사후의 모습도 사뭇 다르다. 스트릭랜드가 죽고 난 뒤 그의 그림과 천재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온갖 저주를 퍼붓던 전 부인마저 그의 복제품을 거실에 걸고 그를 향한 세상의 칭송에 동참한다.
반면 이반의 장례식에서 동료 판사들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그로 인한 보직 이동 등 이해득실을 계산하기 바쁘고 절친인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장례식 후 카드 게임에 갈 생각만 한다. 이반의 아내 프라스코비야 또한 표트르를 만나 국고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융Jung, Carl Gustav은 우리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의식의 중심은 자아 ego이고, 무의식과 의식을 넘어 정신의 핵심은 자기 self이다. 이 자아가 확립해 나가면서 페르소나 persona가 생겨나는데 이것은 집단 사회가 만들어준 행동 규범이나 남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이다. 자기는 무한한 에너지, 창조력의 세계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정신이다. 자기에 관한 인식이 없이는 나를 알지 못한다. 또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으로 향하는 길,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타고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자기실현은 상담을 통해서 무의식의 의식화나, 꿈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종교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인생에서 찾아오는 위기나 신체적 고통 또한 자기실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을 페르소나를 벗고 나를 돌보라는 무의식의 메시지로 깨닫는다면 나의 길을 만날 수 있다.
융의 관점에서 보면 스트릭랜드는 자기를 발견했고 이반은 의식에 머물다 간 사람이다. 스트릭랜드는 청년기엔 삶에 뛰어들어 가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중년에 이르러 그림을 택했다. 그림 외에는 아무것에 관심이 없고 그리기 위해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살았지만, 그것은 그에겐 지복의 삶이었다. 세상의 인정 따윈 필요 없이 오직 자신의 인정이 중요했다.
반면 이반은 사회가 주입한 페르소나를 자아와 동일시하며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어슬렁거렸다. 옆구리의 통증도 의사를 만나 치유해야 할 골칫덩어리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라는 무의식이 보낸 메시지로 여겼다면 고통은 사라지고 타인과 연결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6펜스의 세계에 머물다 달의 세계에서 살다 간 스트릭랜드와 남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매일 자신을 배신하며 살다 간 이반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같은 곳이다. 바로 ‘자기 self’다. 이제는 의식 너머 내가 봐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무의식, 자기를 향해 가야 한다.
우리는 한때 달처럼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새 그 꿈은 동전만 해지고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지금이 의식의 언저리에서 걱정도 불안도 없는 본래의 나를 만날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 달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바로 그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