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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Oct 15. 2023

당신의 방엔 어떤 전망이 있습니까

강이 보이나요 건물이 보이나요

  중학교 시절 학교 진입로 입구에 영화 광고판이 있었다. 그것은 두 줄짜리였는데 윗줄엔 신작 영화를 붙여 놓고 아랫줄에는 B급 에로 영화 포스터가 있었다. 그날은 윗줄의 아름다운 영화 포스터에 넋을 잃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남녀가 그림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창가에 앉아 잘생긴 외국 남자가 산발한 여자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영화는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1989」이었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라고 쓰인 포스터를 보며 ‘어른이 되면 꼭 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20년 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와 회화 학원에서 영어 공부했던 내게 남편은 대학에 가서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라고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겨우 들어간 대학에서는 풍물 동아리에 빠져 선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느라 학업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영문학이란 새로운 세상에 푹 빠져버렸다.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영어 음성학’과 ‘문장 구조론’은 공부하는 과정도 학점도 고통이었지만, ‘영미 시’, ‘영국 문학사’와 같은 과목으로 만난 영어는 내가 알던 언어가 아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에서 천체 관측자가 무한한 천체에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낸 기쁨처럼 영어의 새롭고 매혹적인 얼굴에 반해버렸다.

  4학년 때 영국 소설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과목 교재 『영국 소설의 이해』의 앞부분 개관에서 20세기에 활동한 소설가들의 이름이 나와 있었는데 ‘E. M 포스터’라는 작가에 눈길이 갔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 「전망 좋은 방」이 있는 게 아닌가. 중학교 때 본 영화 포스터와 관련이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이 작품이 어른이 되면 꼭 보리라 다짐케 한 그 영화의 원작이었다.      

  1900년대 초, 사촌지간인 루시(헬레나 본햄 카터)와 샬럿(메기 스미스)이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간다. 여장을 푼 두 영국 여인은 건물에 막혀 아르노강을 볼 수 없는 방의 전망에 실망한다. 둘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전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자, 옆자리에 있던 에머슨 부자父子가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는다. 에머슨 부자는 두 여인에게 자신들이 묵고 있는 전망 좋은 방과 바꿔주겠다고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인다. 루시는 에머슨의 아들 조지(줄리언 샌즈)에게 마음이 끌린다. 이를 눈치챈 사촌 샬럿은 그녀를 데리고 예정보다 빨리 영국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여성을 예술품처럼 소유하려는 금욕적 신사 세실(다니엘 데이 루이스)과 결혼을 약속한다. 인습적 가치에 따라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려던 루시에게 다시 한번 조지가 나타나자, 루시는 고민하다 세실과 파혼하며 조지와 결혼한다.

  이야기는 결혼이야말로 여성의 최고의 해피 엔딩인 제인 오스틴의 영국 통속 소설과 비슷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끝에서 영국 상류 계층의 허위의식과 이별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담아낸 아름다운 피렌체와 영국 시골의 풍광 그리고 뉴질랜드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가 채우는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O Mio Babbino Caro」와 같은 클래식 곡들의 향연이 작품을 세월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30대의 나를 사로잡은 것은 키스 장면이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살인 사건을 본 루시가 기절하자 조지는 그녀를 보살피는데 그때 그는 그들 사이에 뭔가가 일어났음을 깨달았으나 루시는 그 감정을 못 본척했다. 첫 키스는 펜션 베르톨리니에 묵고 있는 영국인들이 교외로 소풍 가는 날에 일어났다. 루시는 일행이 어딨는지 이탈리아 마부에게 물어봤는데 그는 잘못 알아듣고 조지에게 그녀를 데려다준다. 개양귀비가 핀 황금빛 보리밭에 서 있던 조지는 루시를 보자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에게 키스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루시는 세실과 약혼하고 평온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에머슨 부자가 집 근처로 이사를 오고 루시의 동생 프레디와 조지는 친해진다. 급기야 두 남자는 루시 집에서 테니스를 치는데 게임이 끝난 뒤 책을 읽느라 늦게 오는 세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조지는 앞에 걸어가는 루시에게 달려가 기습 키스를 한다.

  에머슨 부자는 일할 필요 없는 상류층 루시보다 낮은 노동자 계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에머슨은 아들을 교육제도에 얽매어 키우지 않고 자유롭게 키웠다. 조지가 루시를 만나 사랑의 전율을 느꼈고 심장이 향하는 대로 그는 그녀에게 “솔직한 욕망의 성스러운 키스 (p.316)”를 했다. 이 사건은 루시가 타인의 시선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대로 살 수 있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루시는 ‘꽉 막힌 건물 전망 같다’라고 한 약혼자 세실과도 호숫가에서 키스할 뻔했지만, 그는 키스해도 되는지 물어보고, 보는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시도한다. 그마저도 안경이 떨어져 실패로 돌아가자 루시는 조지와의 야수적인 키스를 떠올렸다. 마침내 신분의 차이를 이겨내고 조지와 루시는 결혼해 피렌체 펜션 베르톨리니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중학교 때 처음 본 포스터는 조지가 루시의 볼을 어루만지며 방 창가에 앉아있는 영화의 엔딩이었다.  

    

  40대가 되어 다시 영화를 본 다음 E. M 포스터는 왜 제목을 「전망 좋은 방」으로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가 뜻한 전망이 있는 방은 체면과 가식이라는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진짜 내가 주인공인 삶을 말할 것이다. 또는 책을 인용하자면 “우리의 육체가 요구하고 마음이 찬양해 온 사랑 (p.198)”이 있는 삶을 뜻한다. 그렇다면 내 삶은 전망 좋은 방이었을까. 내가 생각한 강이 보이는 좋은 전망은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장을 뛰게 했다.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몸과 마음이 예찬하는 사랑은 없었다. 시행착오로 축적된 고유한 나만의 경험에 의지하기보다 사랑도 부모의 말이나 권위 있는 사람이 쓴 책에 의존하며 안전한 길로 향했기 때문이다. 내 방은 조지의 강이 보이는 전망과 세실의 건물 전망이 반반 섞여 있다.

  전위무용가 홍신자는 “이성의 손끝만 스쳐도 전율이 이는 청춘일 때 몸을 열고 세상을 만끽하라.”라고 했지만, 20대에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공이라는 신기루 같은 목표를 향하여 영혼까지 갈아 넣던 그때는 전망은 고사하고 캄캄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30대가 되어 결혼한 뒤 「전망 좋은 방」을 보니 마음의 지하실에 갇혀 있던 사랑이 그제야 보였다. 이번 생에는 조지의 야수적인 사랑은 글렀다. 다음 생에 돈 후안이나 카사노바로 태어나 청춘의 몸을 열고 그 사랑 실컷 해야겠다.


  내 방 건물 전망 사이로 쉴 새 없이 차가 지나고 사람들은 바삐 어디론가 향한다. ‘건물 전망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내 삶에 결핍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능력이야.’ 하며 자신을 위로하다가도 너무 쉽게 만족하고 사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더 살아봐야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 50대, 60대에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떤 부분이 또 나를 사로잡을까. 그사이 나는 계속 사람에 기대어 사랑하며 살겠지. 그 사랑이 켜켜이 쌓여 내 방의 전망은 *육지에 내려앉지 않는 갈매기들이 해가 지면 날개를 접고 파도 사이에서 흔들리며 잠을 자는, 고래가 떼 지어 다니는 바다가 보였으면 좋겠다.

개양귀비가 핀 황금빛 보리밭 키스 장면



*허먼 멜빌 『모비 딕』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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