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향기

by 래인

처음 만났을 때 잔가지만 앙상했던 그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는 기버야. 반가워. 너는 누구니?"


그가 말을 건넸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나무가 말을 한다니.


두 번째 만남에서 기버의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 조상 중에는 정말 유명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있었어."


그런 나무가 되어줄 수 있다고,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안녕? 나는 엘이라고 해. 네가 내 친구가 되어준다고 해서 기뻐.”


연약해 보이는 기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지만, 예의상 기쁘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했던가?

그날은 그렇게 이름만 말해주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신경이 쓰여 계속 뒤를 돌아봤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 앞에 그늘을 드리워줄 만큼 잎이 무성해졌다.

기버는 연초록빛에서 깊은 초록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엘, 안녕?"


'어? 나를 기억하고 있었네?'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해 준 것이 고마웠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부끄러워 쭈뼛쭈뼛 말도 못 하고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낮의 일을 곱씹으며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후로 자주 그를 찾아갔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는 다양한 빛으로 물들어 갔다.

앙상하고 약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만날 때마다 더 멋있어졌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를 자주 웃게 했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 그는 핑크색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초록 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핑크 솜사탕 꽃이 구름이 되어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는 나무 종족에게만 전해지는 오래된 비밀스러운 전설을 들려주었다.

나는 답례로 내가 보고 있던 책을 읽어주었다.

해 질 무렵까지 함께 놀다가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둘만의 비밀들이 쌓여갔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핑크빛 계절을 우리는 함께 보냈다.


긴 여름이 지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계속되었다.

며칠 동안 우박이 떨어지고, 천둥번개가 이어졌다.

기버가 걱정되었다. 개천에 물이 불어 다리가 잠기고 길이 끊겼다.

몇 해 만에 오는 큰 태풍이라 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물이 빠진 뒤 부서진 다리가 복구되어서야 그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길가에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이 보여 불안한 마음으로 급히 달려갔다.

다행히 기버는 무사했지만, 핑크색 꽃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푸른 잎과 나뭇가지에도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그는 지쳐 보였지만 나와 눈을 맞추고 이내 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마주 보며 안심 어린 기쁜 미소를 지었다.


“엘. 오랜만이야. 널 다시 못 만나는 줄 알았어.

네가 읽어주던 책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비바람을 견뎠어.”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날이었다.

낙엽 지는 가을까지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그해 겨울, 나는 다른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을을 떠나는 날, 첫눈이 내렸다.

기버를 만나 자주 놀러 오겠다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마을을 떠났다.

인사를 하고 돌아보았을 때 나뭇가지 위에는 소리 없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몇 년 후 그 마을을 다시 찾아갔다.

새로운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고,

그와의 장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돌아와서 책의 결말을 이야기해 주기로 했는데,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여름의 추억이 아득히 먼 꿈처럼 멀어져 갔다.


책장을 정리하다 책 뒤 공간에서 모서리가 닳고 빛이 바랜 그림책이 보였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마른 핑크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여름의 싱그러운 꽃향기, 초록의 나무 냄새가 방 안 가득 느껴지는 듯하다.

마지막 장을 펼치자, 황혼의 붉은 노을 속에서 아름드리 큰 나무가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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