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창비>로부터 사전서평단에 선정돼 출간 전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스노볼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둥그런 돔 속에는 보통 작고 예쁜 오두막,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빨간 목도리를 두른 여자아이, 뭐 그런 것들이 오밀조밀 들어 있다. 휙 흔들면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얀 가루가 뒤섞이지만 보통은 시간이 멈춘 듯 행복한 순간 그대로 박제된 세상이다.
아마도, 스노볼을 제일 처음 만든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혹은 엄청난 행복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 스노볼 바깥에서 스노볼을 바라보는 감정은 행복보다는 부러움, 그리움에 더 가까우니까.
박소영 작가의 신작 <스노볼>은 스노볼 바깥에서 스노볼 안을 동경하는 세상을 그렸다. 평균 기온 -41℃의 디스토피아에서 발전소를 돌리거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기관사가 될 뿐인 운명의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의 유일한 오락거리이자 삶의 낙은 '스노볼'이라는 돔 속의 인공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훔쳐보는 일이다. 따뜻한 스노볼 안에 살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은 혹한에서 매일 쉬지 않고 발전기를 돌리지 않는 대신, 자신의 삶을 일거수일투족 내보이는 '액터'가 돼야 한다. 스노볼은 심지어 화장실 안까지 카메라가 설치돼 있지만, 액터의 삶을 편집해 시청률을 높이는 것을 담보로 스노볼에 거주하는 '디렉터'가 있으니 웬만한 편집으로 가짜 삶을 만들어낼 여력은 충분하다.
여기까지가 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분명히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소설인데 어딘지 익숙하다. 매주 금요일 밤 MBC 예능 '나 혼자 산다'를 보면서 낄낄대는 내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TV 속 화려한 연예인을 동경하며 매일 데뷔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어린 연습생들의 삶도 보인다.
TV 속 화려한 그들의 삶이 실제로는 편집된 콘텐츠처럼 행복하지 않다는 것쯤,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소비하는 '대상'은 어떤 허상 속에서 계속 대체될 뿐이다. 모두의 염원과 욕망이 투영된 자리에 오르는 것은 누구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욕망의 목적은 실체가 없으니까.
<스노볼>은 이러한 기제를 잘 파악하고 그려낸 이야기다. 스노볼에 들어가기 위해 매년 어린아이들은 액터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디렉터가 되려는 일념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스노볼 안에는 행복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연출하는 병폐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주인공 '전초밤'은 스노볼 안 최고의 스타 '고해리'가 어느 날 돌연 자살하고, 이를 감추기 위한 디렉터 '차설'의 제안으로 스노볼 속에 들어간다. "고해리는 죽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전초밤의 외모가 고해리와 너무나 흡사했기에 가능했던 설계. 심지어 전초밤은 고해리 채널을 매일 챙겨 보는 애청자였기 때문에 외모뿐 아니라 그녀의 말투와 행동, 습관까지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대체되거나, 누군가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어떤 존재를 이루는 생활이 그의 고유한 삶이 아닌 보여주기 위해 재단된 삶이라면 가능하겠지.
결국 이 이야기는 '고해리'가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철저한 계산으로 탄생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폭로한다. 고해리가 되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수많은 고해리들이 각자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남이 가진 조건을 아무리 덕지덕지 덧입어도 그 속에 내가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고해리가 된 조여수는 자살했고, 고해리로 태어난 고해리는 도망쳤다.
내가 고통스럽게 진로를 찾아 헤매고,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니면서 꾸역꾸역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결국엔 어디인지 모를 그 자리까지 가도, 그곳에 내가 없어서 삶의 의미를 돌연 잃어버린다면. 조여수처럼 죽고 싶지 않아질 자신이 있을까?
책은 계속해서 '나답게 살라'고 외친다. 나다움을 찾고, 나의 고유성을 사랑하면서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너무나 격언적이고 자기 계발서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만큼 누구도 도달하지 못해서 몇십 년 동안 반복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뻔하디 뻔한 자기 계발서의 교훈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조여수에 이어 전초밤, 배새린 세 명의 대체자가 연기했음에도 아무도 '진짜 고해리'가 사라졌다는 의심을 하지 않은 '고해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은 무엇인지, 내가 죽어 없어졌을 때 결국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나만의 영역이 있는지... 등등.
남들이 말하는 나다움과 내가 아는 나다움은 다를 수 있다. 그 사이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고유성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면 된다. 인생은 끊임없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찾아 헤매는 어려운 수학 문제 같은 것이고 나는 그 과정에서 나의 치졸한 모습과 이기적인 모습, 비겁한 모습을 두루 발견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네가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며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저 우리는 맑은 날의 나, 흐린 날의 내가 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고난도 내가 나인 채로 의연하게 버텨 내주길 바란다.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고, 무언가를 죽도록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나에게 주는 환멸과 만족감 모두 삶의 소제목으로 관조할 수 있기를.
내가 왜 고해리로 살아요, 난 명소명인데
-356p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는 한 명의 사람이 아닌, 하나의 허상에 불과했다.
-370p
최고의 액터가 되면 내가 특별해질 거라 믿었다. 그 바보 같은 믿음 때문에,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 자신을 멍청하게 포기했다.
-427p
이로써 우리의 탄생 목적이 사라졌다. 나를 기다리는 위대한 인생 계획과 화려한 수식어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내일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내일의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허상을 흉내 낼 필요도, 나의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일의 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또 다음 날도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4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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