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잠깐 직장동료들과 한 잔 했다. 오래되고 막역한 관계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조심스러운 관계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척하면 척하고 서로의 생각을 읽고 손발이 맞는 사이는 분명 아니다. 상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쏘맥의 비율도, 친구들끼리라면 절대 안 시킬 안주의 종류도 우리는 모른다.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아마 상대의 당혹스러움을 미리 예상해 그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고 잊어줄 수 있을 정도의 애정과 존중, 그 정도의 예의 바른 거리감이 우리 사이에는 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 거리감은 살짝 허물어진다. 회사에서의 직급과 연차, 그리고 각자 업무에 따라 서로 얽힌 이해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난 채로 대화가 이어진다. 술이 있다면 허물어지는 시간이 좀 더 빨라진다. 대화의 주체도, 주제도 수시로 바뀌지만 주로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는지가 주 내용이다. 나도 어느새 목소리를 높인다. 각자의 고통을 토로하는 일종의 성토대회다. 여기는 서로의 잘잘못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니, 모두가 그저 서로의 편을 들어주는 행위를 품앗이처럼 반복한다.
이때 중요한 건 이 비공식 직장인 성토대회 중에도 고삐를 완전히 풀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조건적인 지지와 공감의 리액션에 빠져 나도 모르게 내 썰을 길게 풀다가 문득 이제 막 들어온 지 1년 남짓된 신입사원과 눈이 마주친다. 아까보다 안광의 반짝임이 덜하다. 어 지금 너무 내 얘기만 했나? 보다 즐거운 성토대회의 마무리를 위해 균등한 발언권 분배는 필수적이다. 직급이 높다고, 나이가 많다고 마이크를 독점하면 꼰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3라운드 정도까지 모두의 발언이 돌고 나자 비로소 대화에 마가 뜬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한 자리에서 아무도 다음 장소로 이동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 보니 꽤나 만족스러운 자리였던 것 같다. 우리는 감정이 흐믈흐믈 풀어져 서로 이어진 채로 급히 가방을 챙겨 가게 밖으로 나온다.
또 맞이해야 할 내일의 하루가 있으니까, 다음번 성토대회 개최를 기약하면서 모두 재빨리 흩어진다. 실낱같고 소중한 이 유대가 더 이어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