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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Oct 04. 2018

그냥 직장인, 기어코 다시 여행을 가는 이유

여행에서 남겨온 기억의 단편을 모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10월 말 저는 곧 스페인으로 떠납니다. 


네 그래요. 알게 모르게 머릿속 어딘가에 열망처럼 자리잡은 유럽 남부의 풍경을 보러 드디어 가게 됐네요. 일상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그런 장면 장면들을, 오래된 추억으로 바꾸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겐 눈 내리는 북해도의 설경이 그랬고, 북구의 찬 공기 속으로 펼쳐지는 오로라가, 또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사막의 별 밤이 그렇거든요.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다 가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의 그 기분이란.


그리고 여행들은 또 순간의 장면으로 남아, 오래도록 기억되곤 했죠. 밤 열한시의 에펠탑과, 로마의 타는듯한 햇빛과, 이른 아침 안개 서린 인터라켄 숙소 밖 서늘한 공기가, 또 스콜이 내리던 열대우림이, 오르골 소리가 울려 퍼지는 오타루의 눈 쌓인 길거리가, 게르에 누워 바라본 한 조각 푸른 하늘이 그래요. 


저요? 그냥 직장인입니다. 


남들 다 가는데 가보고 싶고, 또 남들 안가는 데도 가보고 싶고. 이 참에 때려 치고 세계 일주나 떠날까 싶다가도, 통장 잔고 한 번 보고는 다시 월요병에 시름시름 앓고 살아요. 


그래도 뭐, 다들 이러고 사는 것 아니겠나요. 나름대로 저도 제가 꿈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 가장 일상적인 비일상을 찾아 틈틈이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남들이 다들 가본 곳이더라도 가서 느끼는 건 저마다 다르니, 그 어느 누구도 100%는 알 수 없는 저만의 특별한 기억들을 만들러 말이죠.


이전 써오던 글처럼, 숫자와 분석으로 가득한 글은 아니지만….이번에는 여행에서 얻은 기억의 단편들에 대해 적어볼까 합니다. 



기억 하나. 눈 내리는 북쪽 나라에서.


오타루 언덕 꼭대기 동네 신사에서 내려다본 풍경.


홋카이도는 한문으로 풀면 북해도(北海島), 즉 북쪽 바다의 섬이란 뜻인데, 우리나라 제주도도 바다 하나 건너 기후도, 식생도, 사람들의 말투도 달라지듯 홋카이도도 일본 본토와는 또 사뭇 다른 정취가 있는 듯 해요. 일본 하면 으레 떠올리는 것들 대신 그저 눈 내리는 새하얀 풍경부터 떠오르니 말이죠. 제게는 이 세상에는 없을 것만 같은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먼지 덮인 앨범을 펼치는 것처럼, 먼 설국으로의 떠남과 그곳에서 마주한 순간들을 가만히 속으로 떠올리고 있노라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는 여행지에서의 장거리 이동을 꽤 좋아합니다. 특히 현지 교통편을 이용한 것이면 더요. 아마도, 하늘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그리고 관광객이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는 접하기 힘든 것들이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면 보여서가 아닐까 해요. 


신치토세 공항이 있는 삿포로에서 기차를 타고 항구 도시인 하코다테로 가는 길은 서너 시간 남짓 한 긴 거리입니다. 낮은 속삭임만 오가는 조용한 기차간에서 스르르 몰려오는 졸음에 취해 한참을 자다가 눈을 떠보면, 창 밖의 풍경은 눈 뜨기도 힘들만큼 눈부신 한낮 순백의 설원이었다가, 눈 내리는 저녁나절 자작나무 숲이었다가, 눈 그친 후 노을 지는 하늘 아래 펼쳐진 벌판이었다가, 기찻길 옆으로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넘실대는 한 밤의 겨울 바다였다가, 지평선 멀리 눈 덮인 설산이 됩니다.


하나의 단편 영화 같았던 그 풍경들이 제게는 가장 선명한 여행의 장면으로 남아있어요. 



기억 둘. 어떤 밤바다에서 올려다본 하늘.

열대의 섬, 밤바다, 야자수, 별 하나.


이전에 회사를 한 번 옮기면서, 새로운 곳에 입사하기 전 일주일 정도 시간이 비어 친구랑 보라카이를 갔었거든요.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차 타고 종일 달려서 숙소에 도착했는데 부러 번화가를 피해 한적한 곳으로 잡은 보람이 있더라고요. 낮에는 보트 타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온통 정신 없다가, 숙소 앞 마트에서 산미구엘 몇 병 사서 방으로 들어오는 길이 어찌나 여름 같던지. 남들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간다지만 저는 여름엔 여름나라로, 겨울엔 겨울나라로 떠나는 여행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계절의 절정을 몸소 체험하는 느낌이라고나 할지. 


하여간 숙소게 들어와서 가벼운 옷을 입고, 맥주 몇 모금 들이키고, 갑자기 들떠서 숙소 앞 전용 해변으로 나갔었는데 밤하늘에 온통 별빛이 와르르 쏟아지더군요. 모기에 팔다리를 된통 물리는 줄도 모르고 별 하나, 별 둘 하며 헤아리다 시간이 지났어요. 그때, 아 그래 나는 그저 딱 요만큼의 행복만 있으면 되겠다….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 여행의 기억을 사진으로 인화한다면 역시나 빠지지 않고 들어갈 장면 중 하나입니다.




기억 셋. 느린 것들을 사랑하는 법. 


그림 같던 제주의 풍경. 단지 에뻐서만은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나 감상하게 되고 마는 풍경이라서 더.


제주도도 이래저래 많이 갔었습니다. 워크샵, 수학여행, 가족여행 같은 것들을 제외한다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간 건 두어 번 정도긴 하지만요. 가장 최근은 올해 4~5월 즈음입니다. 한창 바쁜 업무로 지쳐있던 시기라 정말이지 쉼표가 간절했던 때였어요. 


제주에 가니, 시간의 모든 초침이 살결을 스쳐 느릿느릿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줄도 모른 채 사무실에만 방부석처럼 앉아있던 서울에서의 삶과는 사뭇 달랐는데, 또 금세 적응 되더라고요. 


눈 떠지는 대로 일어나, 점심엔 뭘 먹지, 저녁까지 뭐하고 놀지 등등 영양가 없는 고민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경험은 그 자체로 휴식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제주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문득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니, 작은 날벌레 한 마리가 물잔에 빠져 버둥거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손가락으로 건져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날개가 말라 날아가는 순간을 기다렸어요. 


작은 것에도 눈길이 가는, 제주도에서의 시간이었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제게 오래 머무는 그런 여행의 순간들이 있어요. 그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여행을 기억하게 하고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스페인 여행은 10월 말이라 또 한동안은 직장인 모드로 바쁘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저런 기억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오고 싶네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도 다시 공유할게요. 곧 만나요 여러분. 


9월의 마지막 날, 서울에서.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마케팅 스터디 매거진 <YOMA>의 멤버들과 함께 연재하고 있습니다. 다소 결은 다르지만, 마케터로서의 고민과 인사이트가 가득한 좋은 콘텐츠가 많으니 일독을 추천합니다!


저는 대충 여행병자 직장인1 정도를 담당하고 있어요. 이번 글은 인트로격의 성격이 강하지만, 앞으로는 다른 멤버의 글과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여행을 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접목시켜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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