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오래오래 행복한 여행을 만들기 위한 자세
재작년이던가요, 동생이 기나긴 입시 생활을 끝내고 대학에 합격한 기념으로 나름대로의 거금을 들여서 태국 푸켓 여행을 간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일년이 조금 넘어갈 시점이라 또 맏이 노릇 한다고 동생 여행비용을 전액 대주는 허세를 부렸더랬죠. 그런데 돈은 객기로 어떻게 된다 치더라도, 시간은 그게 안되더라고요.
일은 바쁘지, 여행은 가야겠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패키지 상품을 결제하고야 말았습니다. 덕분에 참 편하게 다니기는 했지만, 여행의 낭만을 즐기려는 그 찰나마다 보석 상점 쇼핑이니 공연 관람이니 하는 옵션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좀 애매해졌다고나 할까요.
여행은 짧은 장면장면으로 남는 것 같아요. 정신 없이 이동하느라 여유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기억 나는 장면이 몇몇 있는걸 보면 말이죠. 그런데 의외로, 참 사소한 것들이 그렇더라고요. 그 중 하나가 푸켓에서 유명하다는 해변가에서의 순간입니다. 빠통 비치였나 그랬는데, 해변까지 가려면 환락가를 가로질러 가야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쫄보인데, 또 가이드님이 어찌나 겁을 주던지 여자 둘이 다니다가 위험한 일 생기기 십상이니 절대 긴장 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차라리 친구였으면 모르는데, 동생을 데리고 간 여행이라 배로 긴장되더라고요. 그래서 경주마처럼 정말 앞만 보고 걸어갔던 기억이 있네요. 동생에게도 절대 누구와 눈 마주치지 말고 정면만 보고 가자고 정색하고 이야기 했더랬죠.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채로 거리를 걸어 해변으로 향하는데, 유명한 스팟이라더니 막상 도착해서는 밤이라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반쯤은 허탈한 마음으로 바다에 발끝만 담근 채로 서있는데 날씨가 흐렸었나 봐요. 시야 오른쪽 구석에 걸린 절벽 언저리에서 번개가 치는 게 보이더군요. 번개가 칠 때마다 하늘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드는데 무슨 CG효과마냥 비현실적이라, 환락가의 소음을 뒤로 하고 밤바다와 번개 치는 하늘을 한참 서서 보다가 주어진 자유 관광 시간을 다 써버렸어요.
또 하나는...사실 좋은 추억이라 할만한 것은 아닌데 뇌리에 한참 남아있는 기억입니다. 패키지 투어 옵션에는 태국서 유명하다는 코끼리 트래킹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일단은 선택 관광이라 굳이 추가 지출을 해서까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코끼리를 이용한 관광 상품화가 동물 학대냐 아니냐로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동생과 둘만 남아서 다른 일행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가이드님이 안타까웠는지 옆에서 코끼리 학대라면서 안타겠다고 하는 관광객이 많아졌는데, 다 오해라며 코끼리 트래킹을 운영하는 현지인들이 자기 자식보다 아끼는 게 코끼리라고 하더라고요. 본인들의 생계 수단인데 어떻게 함부로 대하겠냐면서요. 그 말을 들으니 저는 더욱 많은 물음표가 생기는 기분이었지만요. 왜냐면 제가 있던 대기 장소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기 코끼리 한 마리가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그 사실 길이가 3미터가 채 안됐었거든요.
그렇게 코끼리를 아낀다면 저 광경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코끼리가 무릎을 꿇고 관광객을 등에 태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텐데 그러면 그렇게 훈련 시키기까지는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을지, 동물을 이용한 관광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정당한지,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등등 수 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동남아는 대부분의 인구가 관광수입에 의존해 살고 있고, 동남아를 찾는 관광객은 현지인이 아닌 소위 ‘돈 많은’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관광을 통해 현지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가히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끼리 트래킹 같은 관광 상품 소비는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 어디쯤에 ‘숨겨진 지상 낙원’이라는 섬이 알려지면 또 앞다투어 달려가는 통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대규모 리조트 단지가 무분별하게 들어서고, 여행의 흥에 취해 뿌리는 돈은 현지의 산업 구조를 기형적으로 뒤틀어놓고 현지인이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죠.
밭 일구어 농사 짓고 살던 사람도 바나나 한 다발을 팔아 버는 돈보다 관광객이 주는 팁이 더 많다면 관광객을 상대로 한 직업으로 전향하거나 바나나 값을 더 비싸게 올려 파는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가지라는 것도 마냥 ‘순진한’ 관광객을 등쳐먹기 위한 현지인의 수법이라고 보기엔 구조적인 문제가 분명 개입되어있다는 생각도요.
이렇게 현지의 환경, 문화, 인력 등을 파괴적으로 소비해버리는 착취 구조의 여행 방식이 관광객에게는 어떻게 돌아오는지 실제 사례를 볼까요? 보라카이도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다가 올 초 필리핀 정부가 폐쇄 선언을 한 바 있죠. 10월 말 재개장을 앞두고 있기는 하지만, 400여 개 리조트 중 환경부 허가를 받은 25개 리조트만 운영한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인생 여행지로 꼽는 곳이라,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소식이네요.
비단 동남아와 같은 개발도상국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우리나라만 해도 북촌이 같은 일을 겪고 있고 바르셀로나, 베네치아도 과잉관광, 이른바 오버투어리즘으로 현지인들의 일상 생활이 어려워지고 집값이 폭등하는 등의 문제가 생겨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각종 규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현재는 길바닥에 앉거나 눕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라고 하니 법안이 통과 되고 나면 베네치아의 풍경은 아마 조금쯤 달라지지 않을까요?
사실 여행 방식에 대한 이런 논의는 개인의 의문 차원이 아니라 관광업계에서도 수년 전부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지적해온 부분이기도 합니다. 공정무역 커피나 초콜릿처럼 여행에서도 현지 문화를 착취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공정여행’ 혹은 ‘지속가능한 여행’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죠. 표현이나 용어 사용은 다를지라도 현지 자연에 미치는 영향은 최소화하고, 지역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소비를 지향하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자는 동일한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 내몽골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요? 갑자기 또 웬 몽골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베이징에서 10시간 버스를 타고 내몽골에 도착해서는 마땅히 씻을 공간도 없는 곳에서 직접 땅을 다져 배수로를 만들고, 현지인지 조리해준 음식을 먹고 현지인들과 어울려 몽골 전통 의식을 치르고, 밤에는 게르에서 침낭을 깔고 잤던 그 때가 때때로 너무나 그리워지는 건,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몽골인들의 삶에 내가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공정여행이 어려운 게 아니고 또 여행자에게는 여행을 여행답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공정여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찾아보니 작년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있었네요.
세계적인 유명 여행사이트 '트립 어드바이저(trip advisor)'도 동물 보호에 힘을 보태는 취지로 지난해 10월 코끼리 트래킹과 같이 동물을 육체·정신적으로 학대하는 관광 코스의 티켓은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제 여행에서도 윤리적인 소비에 대한 고민에 이어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는 게 필요한 때인 것같네요. 보다 건강한 여행 문화가 자리잡아서 이 좋은 여행을 앞으로 모두가 오래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