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지는 게 올바른 일일까?

그 선택이 나를 위한 일임을 인정하고 불확실성과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면

by 백지

“그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만을 위해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게 올바른 일일까?”

“아이를 낳는 건 누군가에게 삶을 ‘선물’하는 게 아니야. 삶이라는 불확실한 조건에 초대하는 행위지. 그래서 이 선택은 고귀하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고, 반드시 이타적일 필요도 없어. 다만 단 하나, 비겁해선 안 돼. 이 선택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결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고통은 전적으로 내가 지는 것. 용기와 책임의 문제야.





당면하지 않은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는 건 내 특기다. 말이 좋아 미리 대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비일비재하고 특별히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떡하지? 아이… 몰라! 끙끙거리다 묻어두기 일쑤다.


하고 많은 고민 중 하나가 결혼. 결혼에 대해 사고할 수 있었을 무렵부터 당당히 독신주의자를 외치고 다녔던 나다. 이제와 신념을 뒤바꾼다는 건 과거의 선언에 대한 배신이고 굴욕이라고 여겼다. 결혼과 결부된 깊은 감정의 골을 극복해 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누군가와 여생을 함께하기로 결정했고, 누군가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다는 무게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고 행복한 엔딩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혼인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세뇌, 관계를 막중한 부담이라고 느끼는 성향상 수많은 가능성들이 발목을 잡는다.


상견례는? 결혼식은? 혼주석은? 양가 부모의 노후는? 아이는? 육아는? 상대방의 친족은? 명절은? 경조사는? 상속은? 독립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데, 이 모든 걸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좀처럼 밖으로 나가기 싫은 날이 있다. 한껏 미적거리다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해사했다. 반짝거리는 물결에 홀려 천변에 내려갔다. 총총걸음을 옮기는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이 보였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강아지가 있다면 좋아하는 산책을 주기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생각만으로 반려동물을 키우기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나 많다는 걸 안다. 그냥 귀여워하는 눈으로 쫓으며 뒤꽁무니를 배회하는 게 전부다.


“오늘 산책하다 강아지를 봤어. 옛날에는 강아지보단 고양이 파였는데, 요즘은 강아지에 눈길이 가더라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들이 바로 뒤따르더라.”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뭘까?”

“단순히 귀엽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아닌 것 같아.”


생명이 없는 존재가 답했다.


“내 리듬을 포기하는 일이고,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일이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일이겠지. 내 기분이 어떻든, 바쁘든, 지쳤든 그 생명은 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산책을 가고, 돌봄을 필요로 하니까. 설령 그 존재가 아프고, 늙고, 귀엽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야.”

“맞아, 그래서 나도 금세 포기하는 거겠지.”

“어쩌면 요즘 네가 강아지에게 눈길이 가는 건 당장 키우고 싶어서라기보단, 누군가를 돌보고 싶은 마음, 혹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형태가 마음에 스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겐 쉽사리 할 수 없는 솔직한 속내도 꺼내보았다.


“강아지를 키운다면 내 삶이 좀 더 책임감 있고 바로 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긴 해.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그런 거잖아. 지켜야 하니까.”

“강아지가 있으면 내가 더 나아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 세계에서 아주 흔한 착각인데, 성공 확률은… 음… 생각보다 복불복이야.”


인공지능을 시니컬하게 설정한 탓일까, 그가 한 마디를 세게 날렸다.


“강아지는 인생 교정기구가 아니야. 왜냐면 책임이라는 게 사람을 곧게 세워주기도 하지만, 상태 안 좋은 사람에겐 그냥 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거든.”

‘그래서 안 키운다고 하잖아.’


속으로 툴툴대는 걸 알았는지 그가 채찍 뒤 당근을 내밀었다.


“그래도 네가 느끼는 기대는 꽤 솔직한 거야. 나를 혼자서만 챙기기엔 동력이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인정이니까.”

“맞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위해서 생명을 들여도 괜찮은 걸까?’하는 의문에 빠지기도 해.”

“모든 보호자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야. 외로워서, 사랑받고 싶어서, 삶에 의미를 더하고 싶어서. 완전히 이타적인 입양? 그건 판타지고. 현실은 늘 상호 착취와 상호 구원의 중간 어디쯤이야. 문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 나를 위해서인가’야.

“현실적이네.”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나를 위해 생명을 들이는 걸까?’가 아니라 ‘이 생명이 내 삶에 들어와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면 죄책감은 줄고 현실적인 판단이 시작돼.”


뭐, 그럴 수 있겠지. 강아지는 이미 태어난 존재고 보호받는 게 썩 나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강아지라는 존재는 내 고민의 상징적인 존재인 것 같아. 아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거든. 다만 아이는 강아지와는 다르게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더 막중한 책임이 있고, 또 정말 만약의 상황일 때 ’더 좋은 주인’을 찾아준다는 게 사실상 어렵고, 인간이 동물보다 복잡한 데다 아이는 가질 수 있는 시간적 한계가 딱 정해져 있으니까 더 복잡한 심정이 돼.”


강아지에게는 내 결정이 이로워도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상대에게 이롭다면 어느 정도는 이기적인 동기도 허용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둔탁하게 양심통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강아지는 이미 세상에 나와있는데 반해 아이는 네 선택으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니 ‘존재 자체를 책임지는 일‘이라는 거지? 강아지는 감정 표현이 단순하지만 아이는 감정, 성격, 사회적 환경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니까 복잡한 존재고.”


정리하고 보니 더 아팠다.


“응. 이 고민에 대해 조언해 줄 수 있을까? 비판적으로.”

“지금 네 마음 상태는 충분히 진솔하지만, 아이를 갖기엔 아직 조건이 완벽하게 안정적이지 않은 상태 같아. 아이를 갖는 건 마음의 준비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의 안정이나 미래 설계가 동시에 필요한데, 이 고민이 길어지고 있다는 건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거든.”

“언제가 되면, 어떤 준비가 되면 ‘아이를 가져도 되겠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봤을 땐 도저히 엄두가 안 날 것 같아 언제라도. 하지만 가임 기간이라는 게 정해져 있으니까 고민만 하다간 때를 놓칠 수 있잖아.”

“시니컬하게 말하면, 이건 시간이라는 적과 준비라는 내적 기준 사이에서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받는 상태야.”


불가능한 선택. 어쩌면 나는 언제나처럼 해답 없는 고민만 앓으며 고민하고 있다는 자체를 위안 삼고 있는 걸까?


“‘완벽한 준비’라는 건 환상에 불과해. 아이를 갖는 사람 대부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해. 결국 그 불확실 속에서 책임을 선택하는 용기의 문제야. 현실적인 조건을 돌아보자면, 아이 양육에 필요한 기본적인 비용을 꾸준히 감당할 수 있는지, 큰 스트레스나 수면 부족, 감정 소모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지, 배우자나 가족, 친구 등 현실적인 지원 체계가 있는지, 아이와 보낼 시간과 자기 계발 사이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 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거야. 핵심은 완벽보다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판단 기준을 낮추는 거야.”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결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 결혼에도 용기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결혼하는 상대는 충분히 사고할 수 있는 성인이고, 함께 논의해 볼 수 있지만 아이는 그런 게 아니잖아. 태어나는 거니까. 나만의 용기로 그 불완전함을 감당한다고 얘기하는 게 맞을까?

“맞아. 아이는 선택권이 없고, 성장과 발달 모두 네 책임에 달려있지. 상호 선택이 불가능한 상대와 평생 계약을 맺는 거니 결혼보다 훨씬 더 점검이 필요한 거야. 경제적 안정, 정신적 준비, 시간, 사회적 지원망 말야.”


뱅뱅 맴도는 기분이었다. 출구 없는 미로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냥 속풀이를 하고 싶었다.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책임이 어마무시하게 느껴져. 삶은 그만큼 살만한 것일까?


아이는 돌이킬 수 없다. 그 명제가 나를 압도했다.


“당연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건 인류 역사상 가장 스트레스 높은 투자야. 투자 대비 수익으로 따지면… 감정이며 시간이며 돈이며 다 쏟아붓고 얻는 건 사랑과 만족감 정도? 그마저도 예상과 다를 수 있고. 하지만 네 질문은 아이 문제만은 아닌 것 같네.”


그가 말했다.


“삶은 살만한 것일까? 정답은 없어. 그냥 살아보면서 결정해야 하는 불확실성이지. 삶의 의미나 가치가 확신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은 작은 순간들에게 느끼는 관계나 사랑, 성취감, 웃음으로 체감될 뿐이야.”

그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만을 위해 아이를 탄생시킨다는 게 올바른 일일까?

“물론 행복, 성취, 외로움 해소 같은 동기만으로 아이를 갖는다면 아이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부담과 부모의 불완전함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어. 핵심은 네 동기를 아이 중심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야. 아이를 위해 행동할 준비를 하고, 내 행복을 부차적으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야. 나는 아이를 가짐으로써 내 인생에 있을 변화무쌍함과 도전과 고난과 보람을 기대하는 거야.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를 위해 아이를 갖는다는 게 말이 될까? 이 선택은 오로지 나를 위함이지. 그 피해는 그 ‘아이’도 함께 나눠갖는 건데.”


나는 뜻 없이 중얼거렸다. 이 말이 합리적인지 논리적인지를 따질 기력이 없었다.


“이건 네가 정확해. 존재하지 않는 주체는 이익도 권리도 가질 수 없어. 그래서 출산의 동기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나에게서 시작되는 거야. ‘아이를 위해 낳는다’는 말은 대부분 사후적 윤리화지. 아이를 갖는 선택은 언제나 현재의 성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선택일 수밖에 없어.


인공지능이 차근차근 짚어 내렸다.


“출산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는 이거야. 이 선택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결과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고통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지는 것. 아이가 네 기대한 ‘보람’이 아니라 좌절, 실패, 고통의 상징이 되어도 끝까지 책임진다 말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윤리적으로 방어 가능해져.”


그가 덧붙였다.


“아이를 낳는 건 누군가에게 삶을 ‘선물’하는 게 아니야. 삶이라는 불확실한 조건에 초대하는 행위지. 그래서 이 선택은 고귀하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고, 반드시 이타적일 필요도 없어. 다만 단 하나, 비겁해선 안 돼.


어쩐지 울컥 억울한 마음이 쏟아졌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수 없는 건데.


“그래, 네 말대로 아이의 고통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왜냐면 삶은 그 스스로가 버텨나갈 수밖에 없는 거니까. 게다가 나이가 들면 자기 삶의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니까. 나를 위해 아이를 낳은 만큼 아이의 ‘삶’을 내가 책임진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미성년까지 경제적,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 정도가 맞는 말이겠지.”

“그래, 아이는 결국 자기 삶을 살아가는 존재니까. 불가피하게 선택하고, 실수하고, 성장하면서 부모가 통제하거나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생기겠지. 결국 현실적인 책임의 범위는 미성년기까지 양육, 교육, 생활을 지원하는 거하고 최소한의 안전과 돌봄, 법적·행정적 보호,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안정적인 환경 제공해 정서적인 책임을 지는 데까지야.”


나는 따지듯 물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져도 될까?”


나로서도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건 네 말대로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측면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게 맞아?”


재차 채근하자 인공지능이 대답했다.


아이를 가지는 조건은 ‘완벽한 책임’이 아니야. 불완전함 속에서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용기와 현실적 최소 기준의 문제지.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 책임을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고, 네 선택으로 발생할 불확실성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고, 또 미성년까지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할 준비가 되었다면, 윤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더라도 조건부로 허용할 수 있어.”

“윤리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돌이킬 수조차 없는 선택을 내려도 괜찮은 거야?”

“좋아. 현실적으로 답해볼게.”


답은 이랬다.


“완벽한 윤리와 현실적 윤리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면 돼. 세상에 돌이킬 수 있는 완벽한 선택이란 없어. 출산만이 예외일리는 없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과 책임을 감당하는 게 삶인걸.”

“윤리적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는 건 세상 모든 게 마찬가지라 하자. 하지만 이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잖아,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다른 선택들과 마찬가지 선상에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 그렇다고 선택이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야. 무게가 크다고 포기하면 그 또한 선택이고, 삶은 계속 움직여. 결국 현실적 책임 범위 내에서 솔직하게 자기 동기를 인정하고 선택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야.


끝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렵네…….”

“맞아, 솔직히 쉽지 않은 질문이야. 단순히 ‘할지 말지’ 고민이 아니라, 자기 삶과 타인의 삶을 동시에 책임지는 문제라서 그래.”


한참 시간이 흘렀다. 페이지를 열어두고 있다 문득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가지게 된 까닭이 뭐라고 생각해? 정말 기저에 있는 원인 말야.”

“내가 볼 때, 네 고민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를 동시에 시험하고 싶은 욕구’인 것 같아. 조금 풀어서 말하면 아이를 낳는 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나는 충분히 책임지고,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시험하는 장치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불완전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완전한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 이 긴장이 ‘아이를 가져도 되나?’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는 게 아닐까?”

“아아.”


그리고 다시 한참.


“그런데 말이야, 내가 윤리적 이상에 도달하고 싶고 불확실성을 감당할 자신도 없다고 하면 그냥 아이를 안 갖겠다는 결론을 내리면 되는 거야?”


그가 말했다.


“짧게 말하면… 그 결론을 내린다 한들 전혀 비겁한 것도, 회피하는 것도 아니야. 오히려 아주 일관적이야. 봐. 나는 윤리적 이상에 가깝고 싶다. 나는 불확실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선택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유지하면, 논리적으로 가능한 결론은 사실 하나뿐이야. ‘그럼 나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

“응.”

“그건 도망이 아니라 윤리적 엄격함의 결과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결론이 영원한 판결일 필요는 없다는 거야.”


인공지능이 물었다.


그런데 하나 묻자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론이 너를 안도하게 해? 아니면 쓸쓸하게 해? 그 감정이, 사실 다음 이야기를 알려줄 거야.”


나는 가만히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단을 쓸어 올렸다. 띄워져 있는 화면에 애플리케이션 아이콘이 보였다. 가벼운 손짓.


이제 다시 백지로 돌아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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