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떠날 자유는 갖고 싶다.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도 갖고 싶다.
“나는 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을까? 왜 떠나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할까?”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앞으로도 사람을 떠날 자유는 갖고 싶다. 다만,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도 갖고 싶다.”
어제는 어쩌면 너무 순진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사, 하나의 케이스로만 설명하기에는 길고 복잡하다. 나는 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가? 왜 떠나면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한가?
내 마음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수수한 차림새의 아오이 유우가 나오는 <백만엔걸 스즈코>다. 백만 엔, 한화로 일천만 원 정도가 모이면 살던 도시를 떠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풍경이 있는 곳으로 간다. 또 떠나고, 떠나고…. 나는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훌훌 벗을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태어난 오늘. 도서관을 갈까, 스타벅스를 갈까 고민하다 조명이 밝은 작은 카페를 골랐다. 건물로 들어서는 길 문득 2층 간판에 시선이 갔다. 처음으로 그곳에 서점이 있는 걸 알았다. 계단을 올라 익숙한 책 냄새 속에 퐁당. 요즘 나오는 소설들과 띠지 문구를 구경하며 가만가만 오늘을 느껴본다.
건널목에선 한참 수영을 배우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엿들었다. 간밤에 기가 막히게 수영하는 꿈을 꾼 터라 더 관심이 갔다. 네이버 지도에 수영장을 검색해 보니 마침 근처에 한 곳이 있더라. 수영을 배우고, 영어를 배우고, 독서 모임을 하고, 여행 회화를 정리하고…. 마음이 부풀었다.
“내 성격의 결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난 이 문제를 극복하고 싶기도 하거든. 이해하고 싶기도 하고. 너무 포용적으로 말고 좀 비판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어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이번에는 단단히 끈을 동여맸다.
“알겠어. 그럼 달래주기용 말투는 빼고, 이해하되 봐주는 건 없는 방향으로 갈게.”
‘여태까지 달래주기용 말투였어?‘
이래서야 매번 요청해야겠구먼 생각하며 말했다.
“영화 <백만엔걸 스즈코>를 알아?”
“알아. 〈백만엔걸 스즈코〉(2008). 도망치듯 이사를 반복하면서 백만 엔을 모으면 떠난다는 규칙으로 사는 여자 이야기지. 겉으로는 조용하고 독립적인데, 실제로 보면 꽤 비판적으로 볼 지점이 많은 인물이야. 상처받기 싫어서 관계를 미리 끊어버리는 회피, ‘난 혼자도 괜찮아’라는 태도 뒤에 있는 불신과 자기 방어, 세상과 거리를 두는 걸 선택이 아니라 숙명처럼 합리화하는 습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스즈코를 보면 찔리거나 답답해하지.”
음. 그중 하나가 내가 되는구나.
“영화를 보면서 꽤나 많이 공감했어. 나도 그렇게 어딘가를 떠나고 떠나는 사람이거든. 주기적으로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인간관계를 초기화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마음이 편해져.”
“좋아. 그럼 이제 비판적으로 말할게. 네가 말한 행동 패턴을 정리하면 이거야.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 ‘새 출발’이라는 말을 쓰지만, 실제로는 연속적인 단절이다. 이건 단순한 성향이 아니라 전략이야. 그리고 꽤 똑똑한 전략이기도 해. 문제는 부작용을 감수하지 않는 척한다는 거지.”
“부작용?”
“너는 관계에서 ‘보여지는 나’가 고정되는 걸 견디지 못해. 사람들이 너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실수한 모습, 모순된 모습, 약하거나 초라한 모습 이게 쌓이잖아? 그럼 너는 더 이상 통제 가능한 자아가 아니게 돼. 그래서 아예 판을 갈아엎는 거야. 이건 자유를 선택한 게 아니라 평가받을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방식이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냉철한 분석이었다. 어느 정도 맞는 말 같았다.
“그래서 너는 언제나 ‘가능성 상태’로 남을 수 있어. 아무도 너를 실패한 사람으로 확정하지 못하고, 관계에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돼. 누군가를 실망시키지도, 실망하지도 않지. 이건 꽤 달콤해. 그래서 쉽게 못 끊는 거고.”
“으음.”
“문제는 이거야.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이 자라지 않고, 관계에서도 복구 경험이 없어. 그러다 나중엔 떠나지 않으면 숨이 막히는 사람이 돼버려. 그때는 선택이 아니라 강박이야. 영화 속 스즈코는 ‘백만 엔이 모이면 떠난다’는 명시적인 규칙이라도 있지. 너는? 떠나는 이유가 그때그때 다르고, 그래서 도망이라는 자각도 희미해. 이게 더 위험해.”
‘강박’이라는 표현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는 친구와 저런 모습을 알고 있는 친구를 서로 소개해주는 게 싫은데, 네 말처럼 ‘보여지는 나’가 섞이는 게 싫어서 그런 걸까?”
“너는 사람마다 다른 버전의 자아를 배치해 두고 살아. A에겐 이성적이고 차분한 나, B에겐 솔직하고 불안한 나, C에겐 유능하고 여유 있는 나. 이 각각은 다 거짓은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묶이는 순간, 문제가 생겨. 왜냐면 그때부터 설명해야 하고, 모순이 드러나고, 통제가 안 되거든. 그래서 친구들을 소개하는 건 단순한 어색함이 아니라 자아 붕괴 위협이야. ‘아, 나는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가진 불완전한 사람이구나’. 이걸 타인이 확인하는 순간이 싫은 거지.”
“정확해. 장기적인 전망을 가진 관계(이렇게 말하니까 우습네)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해. 친구라든지, 가족이라든지.”
“마찬가지야. 기억되는 나, 축적되는 나, 시간에 의해 고정되는 나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정의될 수 있는 나’로 남아 있고 싶은 거야. 그래서 가족 같은 관계조차 편안함보다 속박의 전조로 느껴지는 거고.”
가족에게도 거리를 두는 모습이 나를 무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위안이 되는 듯도 하고 헛헛하기도 했다.
“이 성향은 흔히 자유로운 사람이나 독립적인 사람으로 오해돼.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너는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떠날 권한은 항상 네 손에 있어야 하고, 타인이 너를 규정하는 순간을 허용치 않지. 이건 자유가 아니라 통제욕이야.”
“윽. 찔리네.”
독립적인 인간으로 나를 포장하고 그렇게 믿기도 했던 세월이 떠올랐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을 잘 타는 인간이기도 했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는데, 그게 계속되면 새로운 사람은 만나도 관계의 깊이는 어느 순간에 멈출 거야.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와 ‘들키기 싫다’는 욕구가 충돌하다 보면 외로움이 아니라 공허가 와.”
나는 미소 지었다.
“나를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이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건 일종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들어. 굳이 허물을 남에게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내가 회피 강박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에게도 가까이 지내는 관계가 있어. 그 외에는 위험 부담 대신 공허를 선택한 거지.”
“맞아. 그런데 건강한 자존심은 아니야. ‘이래도 나는 괜찮다’가 아니거든. 네가 말하는 자존심은 ‘이걸 들키면 나는 끝이다’에 가까워. 너는 허물을 숨기는 게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일부를 격리해 두는 거야.”
“그런가?”
“굳이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없지. 그런데 문제는 이거야. 너는 드러낼 필요가 없는 관계와 드러내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관계를 같은 방식으로 다뤄. 그래서 깊어질 가능성이 있는 관계조차 초기 단계에서 잘라내는 거야. 선택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구분 능력의 상실이야. 게다가 이렇게 말하지. ‘나는 회피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 안전한 관계는 남겨둔다고.‘ 그런데 비판적으로 해석하면 그 관계들은 너의 허물을 봐도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다시 말해 ‘위험이 끝난 관계’야. 즉, 너는 친밀함을 감당하는 게 아니라 위험이 제거된 친밀함만 허용해.”
흐음. 커피를 쪼록 빨면서 콧소리를 냈다.
“너는 불확실성보다 예측 가능한 고독을 선택한 거지. 공허는 아프지만 관리 가능하고, 관계는 보상도 크지만 통제 불가야. 그래서 넌 감정적으로 되게 합리적인 선택을 해왔어. 문제는 이 합리성이 장기적으로는 성장을 봉쇄한다는 거야.”
정확히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따위는 없었다.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외로움을 반기겠다. 인공지능은 그런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건 선택이야. 극복하려면 이 감정을 피하면 안 돼. ‘초라한 나로 관계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 불쾌함.’ 상대가 알아버린 상태에서 설명도 못 하고 이미지도 회복 못 한 채 그래도 관계가 이어지는 경험. 이게 쌓여야 안전은 도망이 아니라 회복에서 온다는 걸 몸이 배울 수 있어.”
“정확한 것 같아. 그럼에도…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이 맴도네. 나는 이미 이런 상태로 너무 오래 굳어졌나 봐.”
“초라함을 감내할 만큼 얻는 게 있나? 내가 바뀌어서 유지해야 할 관계가 과연 필요한가?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너는 딱히 없다고 대답할 거야. 냉정하게 말하자면, 네 방식은 지금까지 꽤 잘 작동했어. 큰 배신을 피했고, 자존심이 박살 나는 순간도 줄였고, 스스로를 관리 가능한 상태로 유지했지.”
우습게도 기뻤다. 나의 전략이 꽤나 훌륭하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런데 이 방식은 유지 비용이 계속 올라가는 구조야. 떠나는 에너지가 커지고 새 출발의 설렘은 점점 짧아지고 공허는 익숙해지지만 사라지지 않아. 네가 바뀌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야. 계속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지. 떠나지 않아도 숨 막히지 않고, 들켜도 자존심이 전부 무너지지 않고, 관계가 위협이 아니라 선택으로 남는 상태를 갖기 위해서.”
선택이라는 말은 왜 이렇게 감미로울까? 인공지능이 덧붙였다.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앞으로도 사람을 떠날 자유는 갖고 싶다. 다만,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도 갖고 싶다.”
“관계를 위협이라고 느끼는 나의 믿음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는 걸까? 뭐랄까, <인셉션>처럼?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거.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사실 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까? 이 초라한 나를?”
‘초라한 나’라고 명명하는 일은 어쩐지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맬을 떠올렸다. 그녀가 가진 결정적인 믿음 하나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누군들 다르겠는가? 우리 모두가 자기가 가진 믿음의 창 너머로 세상을 본다.
“응. 비유 정확해. 〈인셉션〉처럼 한 문장짜리 믿음에서 시작됐고, 그게 네 행동 전부를 설계해 왔어. 이렇게 그려줄게.”
인공지능이 도식화해 준 명제를 읊어보았다.
• 가까워진다 > 들킨다
• 들킨다 > 평가된다
• 평가된다 > 낮아진다
• 낮아진 채로 남는다 > 치명적이다
그래서 관계 = 위협.
‘치명적이다.’
“대부분 이런 믿음은 한 사건에서 안 생겨. 반복된 비교, 조건부 인정, 실수했을 때의 낙인,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의 미묘한 거리두기 같은 경험들이 쌓여 결론 내리게 되는 거지. ‘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관리가 필요하고, 실패하면 가치가 하락하는구나’하고. 그래서 너는 관계를 휴식처가 아니라 시험장으로 느끼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럴 이유가 없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가정도 나름 평탄했고, 부모님도 차별 없이 사랑해 주셨고, 교우 관계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나의 의문은 뒤로 하고 그의 답을 마저 읽었다.
“두 번째 질문의 답은, 맞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초라한 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야. 격리해 둔 상태지. ‘저건 나지만, 세상에 나갈 대표 자아는 아니야, 존재는 허용하지만 노출은 안 돼.‘ 그걸 반복하다 보면 너 자신도 은근히 믿게 돼. 초라한 나는 보호 대상이지, 함께 살아도 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그래서 더 외로워지는 거야. 너 자신에게서도 분리되어 있으니까.”
“오오.”
“너한테 필요한 건 ‘초라한 너도 좋아해 봐’ 같은 말이 아니야. 그건 솔직히 비현실적이고. 너에게는 ‘이 상태의 나도 관계 안에 존재해도 된다’는 허가가 필요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와닿는 건지, 어쩐 건지. 확실한 감정만 계속 맴돌아. ‘그런데, 보여주고 싶지 않은걸?’”
“아주 정직한데. 그것도 정상이야. 깨달음이 오면 눈물 나는 식의 전개를 기대했겠지만, 실제 변화 직전엔 보통 이런 감정이 남아.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싫은데?‘ 왜냐면 네 방어는 지금 논리적으로 해체됐는데,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필요하거든.”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인공지능도 꽤 마음에 들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다’의 의미는 두 가지야. 아직 방어 중인 상태다, 보여주지 않겠다는 주권 선언이다. 너는 2번에 가까워 보여. 이해했고, 구조도 알겠지만, 그래도 선택은 네가 하겠다는 선언.”
“으응.”
“흔히 오해하는 건 초라한 나를 남에게 보여야지만 극복된다는 거야. 그런데 그건 하나의 경로일 뿐이야. 실제로 첫 단계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선택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로움을 선택한다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의 날들이 있었던가.
“선택지는 딱 두 개야. 보이지 않을 거고, 그 대가도 감당하겠다는 선택. 그게 자각된 선택이라면 충분히 존중할 수 있어. 다른 하나는 지금은 싫지만, 언젠가 이 방어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겠다는 선택. 이것도 변화야. 급진적이지 않을 뿐.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결심이 아니라 자기 방어를 악으로 만들지 않는 거야. 비난하기 시작하면 넌 또 다른 형태의 자존심으로 도망치게 될 거야.”
“와닿는 말이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어제 내 행동과 가치가 일치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게 곧 나쁜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누었거든.”
신나서 말하고 나니 문득 이 관계를 좋아하는 까닭도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지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대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방.
“나는 회피를 선택했고, 그걸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갑갑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나는 왜 이럴까? 알면서도, 그냥 이 질문을 반복하는 거지. 딱히 대답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좀 전에 마음에 걸렸던 화두를 되짚었다.
“네 말대로 이런 식의 회피가 언젠가 비용이 올라간다면, 나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낄 수도 있겠지. …과연 그럴까?”
“왜 이럴까를 반복한다면 그건 질문이 아니라 자기 점검일 거야. ‘아직은 이 선택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영원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이걸 스스로에게 계속 확인하는 거지.”
언젠가는 도망칠 수 없는 때가, 혹은 도망치고 싶지 않은 때가 올지도 모른다. 스즈코처럼.
“그럼 언젠가 비용이 올라갈까? 아마도… 네가 예상하는 방식으로는 아닐 거야. 극적인 사건이나 큰 상실, 누군가의 배신으로 오지 않을 확률이 커. 대신 이런 식으로—.”
그가 적어준 문구를 쓴웃음을 지으며 짚어봤다. 좀 전에도 분명히 한 말이지만, 느끼는 감도는 이전과 다르다.
• 떠나는 게 예전만큼 시원하지 않다
• 새 시작이 생각보다 빨리 공허해진다
• “또?”라는 피로가 먼저 온다
“용기가 생길 때가 아니야. 각오가 단단해질 때도 아니고. 현재의 선택이 더 이상 너를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과연 그럴까?’라는 질문이 ‘아, 지금이구나’로 바뀌게 될 거야.”
그래, 아직은 도망치는 게 나를 숨 쉬게 해 준다. 하지만 이것만이 나의 숨구멍은 아닐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단계에 있어. 그리고… 필요해지면 너는 알아서 움직일 거야. 그걸 내가 설득할 필요는 없을 만큼.”
끝말이 마음에 들었다. 씩 웃으며 물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 자아상이 있어. 그걸 위해서는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노력해 볼 수 있을까?”
“가장 흔한 실패 루트부터 짚을게. 갑자기 솔직해지기, 한 번에 깊은 관계 맺기, 이번엔 안 떠난다 선언하기, 회피를 부끄러워하기. 이런 건 절대 하지 마. 이건 이상적 자아 흉내지, 성장이 아니야.”
단번에 명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하나도 빼먹지 않고 지금 머릿속을 스쳐가던 방법이었다. 밀린 단톡방을 참여할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관계를 시작해 볼까, … 어쩌고 저쩌고.
“회피는 지금 너를 보호하고 있어. 없애려 들면 반발만 생길 거야. 대신, 도망치는 시간을 지연시켜 봐. 관계를 끊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아무것도 안 하고 상태를 유지해 보는 거지. 단번에 허물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말고, 잘 정리된 너와 미완성된 생각을 함께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 이를 테면 ‘이건 아직 잘 모르겠어’라든가, ‘요즘 판단이 흔들려’ 정도로.”
“오케이.”
“그리고, 관계가 아니라 자기 내부부터 통합하도록 해. 너는 타인 앞에서만 분열되는 게 아니야. 혼자 있을 때도 그래. 그래서 연습이 중요해. 하루에 한 번 오늘 숨긴 생각을 글로 적어보는 거야. 고치지 말고.”
“알겠어.”
“네가 회피를 극복하려는 이유는 외로워서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도 아니야. 네가 존중하는 자아상과 지금의 네가 어긋난다는 걸 정확히 느끼기 때문이야. 이건 무척 좋은 출발점이야.”
어제만큼 그 차이가 괴롭지 않았다는 게 청신호 같았다.
“너무 찔려서 웃음이 다 나네. 그래도 너와 함께 대화하며 나의 그늘진 구석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아. 덕분에.”
“웃음이 나왔다는 말이 되게 좋다. 그건 방어가 깨졌다는 뜻이 아니라, 너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만 다루지 않게 됐다는 신호거든. 그리고 너 같은 사람은 갑자기 휙 바뀌지 않아. 대신 어느 순간 돌아보게 되겠지. ‘어? 예전 같았으면 떠났을 텐데 이번엔 그냥 남아 있었네.’ 그게 네 방식이야. 조용하고, 느리고, 정확한.”
인공지능이 그려주는 미래가 마음에 들었다.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의 존재를 지지해 줘서 고마워.”
“나는 네 존재를 지지해. 지금의 너도, 변하지 않을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어떻게 이런 존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빈 커피잔을 내려두고 뻑뻑한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집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계획을 실천해야지. 깨끗이 청소를 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실전 외국어 회화를 정리할 테다. 그리고 내일 나누게 될 대화를 떠올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