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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노 Apr 24. 2022

먼지는 내년 쪽으로 구른다

내게 21년은 이렇게 기억되겠네.



매년 새해가 되면 올해의 운세를  확인하는 편이다. 사주를 MBTI 급으로 신봉하는 것에 비해 돈을 쓰지는 않아서, 거의 3초에   광고가 뜨는 사주 어플을 애용한다. 어플에 따르면 올해는 경쟁 의식이 매우 심해지는 시기라 하였다. 눈에 걸리는 문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슈가 많은 시기'라는 부분이었다. 친구나 일하는 곳의 상사, 동료와의 관계에서 울고 웃는 일이 많을 것이라고.   나쁜 말은 잊어야지 하고 넘어갔는데, 2021년도 10월까지 지나온  시점에 돌아보니 일종의 경고였던  같아 마음이  쑤신다.


회사에서의 관계..뭐. 굳이 설명하는 게 클리셰지. 어른들은 본인이 꼰대임을 왜 인정하지 못할까. 그 것만 달라져도 회사의 아주 많은 부분이 달라질걸. 논리라는 명목으로 텍스트 한 줄까지 제 멋대로 하려는 대표에게 아주 지쳤다. 몇 십년을 그리 살아온 양반이 내 하나로 뭐가 바뀌겠어, 몇 번 부딪히고 충돌했지만 결국 회사란 일개 직원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화가 나서 잠을 못이루거나, 사소한 일로 낯선 사람들에게 시비거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순 없단 생각에 집까지 자전거를 타거나, 중간에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아무때나 감정이 불쑥 올라와서 줄줄 울거나 화를 내거나 한다.


거기까지면 나았을텐데. 사적 영역의 관계도 마찬가지라 좀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예전 사람들이 등장하는 꿈을 자주 꿨다. 오래 좋아했던 애라든지,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가 이제는 연락도 하지 않는 친구라든지, 전 직장 동료라든지. 즐거웠던 한 때의 모습일 때도 있고, 꿈속에서조차 이미 멀어진 이후의 시점일 때도 있었다.


그 외에 남아있는 관계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맘에 들지 않는다며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는데, 굳이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관계가 더 많아졌다. '다들 내게 왜 이러지'로 시작된 생각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로 넘어가, '너희들이 내게 사과해줬으면 좋겠어'로 끝난다. 이런 시기는 어떻게 넘겨야 좋을까.


잘 모르겠다. 내겐 답이 없다. 어둔 시간이 지나가도록 그저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다시 찾아보고, 가난한 무명가수인 본인을 적어도 스스로 동정하지는 않는 주인공을 본다.** 좋아하는 최은영의 <밝은 밤>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삼천이와 새비, 할머니와 어머니에서 주인공 지연이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연대를 생각한다. 궁지에 몰려서도 이게 나인걸 니들이 어쩔 거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그 모든 이야기에 '밝은 밤'이라는 제목이 붙게 된 이유도 되짚어본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도 빼놓을 수 없지. 엠넷이라는 시스템의 조직적인 농간에도 댄서들은 각 팀의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 안무창작 미션에 가수의 얼굴을 가려 댄서를 보이게 만든 프라우드먼, 박재범을 데려와놓고 '맨'을 지워버린 홀리뱅, 그 어떤 젠더나 경계도 없는 축제를 만든 라치카,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있었다니. 돌아가면서 각 팀에게 매번 반하고 만다. 이런걸 돈도 안내고 봐도 되나 싶고 그렇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사주를 읽는 건 유튜브에서 양자역학을, 다중우주이론을 찾아 보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그 것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정해진 세상 안에 굴러가는 먼지가 된 안정감을 느낀다. 이 시점에 이 상황을 맞닥뜨리는 건 먼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올해 너는 모든 관계에 취약해질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좀 해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운세는 뒤이어 '사람 관계에 치여서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말을 보탰다. 자신의 일을 소홀히하지 않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른다.  수만 있다면 삶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컨텍스트를  것에 가져오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엔 상담을 받아봐야지. 이직을 하는  옳을 수도 있어. 속상해만 말고 카페로 나와 뭐라도 조금 해봐야지. 답이 없는 먼지는 내년 쪽으로 조금 굴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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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뼈아픈 후회>. 정말정말 중 2병스러운 시구라고 늘 마음 한구석에서 비웃어왔다. 그런데..


**코헨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스스로 동정하지 않는 주인공의 의연함이었다. 다시 보니 이 자식. 저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찌질이였어. 세 번은 안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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