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의 진짜 핵심은
근 몇 년간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워라밸이 한동안 조용하다가, 안성재 셰프의 한마디로 다시 뜨거워진 것 같다.
한동안 이런저런 의견들을 지켜봤는데, 크게 두 가지로 갈리는 것 같다.
‘세상에 돈, 지위가 다가 아니므로 워라밸은 꼭 지켜야 한다’와 ‘워라밸 지키다 도태되고 후회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들은 전혀 논쟁의 핵심이 아니다.
당장 돈이 급하거나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워라밸 찾다가 망하든,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워라밸을 지키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든,
워라밸 모르겠고 냅다 달려서 원하는 바를 빨리 이루든, 혹은 그중에 너무 많은 것을 잃어 나중에 후회하든,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다.
누군가는 워라밸을 챙기며 행복할 수도, 누군가는 안 챙기며 행복할 수도 있다.
요즘 세대라고 모두가 워라밸을 챙기려 하지도 않고, 윗세대라고 모두가 워라밸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더 정확히 바라보려면 워라밸이 쟁점이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워라밸이 논쟁으로 떠오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대략 10년 정도 전만 해도 워커홀릭이 멋이고 자랑이던 시기였다.
TV엔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누가 더 열심히 사는지 경쟁하듯 잠을 몇 시간 잤는지, 일을 하루에 몇 시간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 직장인의 많은 수가 우울증을 달고 있고, 자살률은 역대 최대로 치솟았으며, 산재 사고의 가장 큰 비율을 과로가 차지하고 있다.
흔히 과로라고 하면 ‘힘들면 그만하지 왜 죽을 때까지 해?’라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미친 듯이 일을 해도 언젠가 적응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몸의 과부하가 급작스런 심정지로 이어지며 사망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보통 멕시코에 이은 2위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멕시코의 노동강도는 우리에 비해 훨씬 낮다고 한다.
자살률이 가장 큰 문제라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야기하면서 일 좀 덜 하자고 하면 경기를 일으킨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이 자기 시간을 일에 더 투자하는 걸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모두가 달려 나가는 와중에 너무 많은 수가 나가떨어져 버리는 상황을 해결해 보자는 것이다.
'크게 봤을 때도 그게 모두를 위해 이익이 아닐까?'
워라밸을 찾는다는 걸 논다는 걸로 직결시키는 것도 너무 섣부른 생각이다.
특히 열심히 사는 것에 전 국민이 가스라이팅이 돼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하루 1–2시간의 여유가 주어져도 누군가는 또 뭔가를 찾아 열심히 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수십 년째 부족하다고 말하는 창의성은 그럴 때 나온다.
모두가 기업의 부품으로써가 아닌, 자기 스스로의 삶을 찾으며 더 다양하고 풍성한 삶들이 생겨난다.
워라밸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를 살던 세대들에겐 이 단어가 마치 자기 삶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온몸을 갈아 넣은 덕에 이제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가 온 것은 분명하고, 지금 세대가 단순히 어른들의 길을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층 더 발전시키려는 노력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서로 간의 대화가 단절된 채로 온라인에서 극단적인 경우만 난무하다 보니 대립만 강해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것 또한 사람의 욕망이다.
일을 아예 안 한다는 것도 아니고 적게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너무너무너무’ 많이 해서 조그만 틈조차도 없는 상황을 정상 범위 정도로만 돌려놓자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달리고 싶은 사람은 열심히 달리면 된다.
특히나 한국에선 당장 일하지 말고 놀라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일하는 사람 천지일 게 뻔하다.
우리는 그동안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왔다.
사실 지금 위치 정도면 우리의 환경을 생각할 때, 경제적인 순위에선 거의 최고치에 올라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멈추는 게 아니다.
잠깐 숨 쉴 틈을 주자는 것이다.
그래야 또 달릴 힘이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