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달과 6펜스

by 나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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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는 흔히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 이상과 생계의 대립을 떠올리게 한다. 서머싯 몸이 이 소설을 쓴 1929년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2025년 서울에서 이 책을 읽은 나는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듯 떠나서 결국 정착한 그곳이 그렇게 다른 곳이었을까. 또 다른 형태의 질서에 종속된 것은 아닐까. 결국 여기 말고 어딘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화자인 '나'의 시점에서 가까이 지냈던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스트릭랜드는 영국의 주식 중개인이다. 집안을 살뜰하게 건사하는 아내 에이미 두 자녀를 두고 있다. 하인을 두고,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다니고 정기적으로 사교모임을 열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도 갖췄다. 곁에서 지켜보던 화자가 질투가 날 정도로 안정적이고 완전해 보이는 가족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족의 가장인 스트릭랜드가 ‘돌아오지 않겠다. 찾지 말라’는 내용의 짧은 쪽지 한 장 덜렁 남겨두고 사라진다. 사람들은 '불륜'을 의심한다. 화자가 아내 에이미의 부탁을 받고 그가 떠났다는 프랑스로 건너가 알아낸 가출 사유는 뜻밖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p.67)



마치 장난처럼 느껴지는 황당한 그림 타령에 화자도 읽는 나도 당황한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당황한 화자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 그는 “나는 그려야 해요”라고 답할 뿐이다. 마치 그리지 않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느냐 못 치느냐가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다. 그는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문명사회에서 터득한 무형의 자산인 사회성도 던져버리고 겉과 속을 비워낸 사람 같다. 심지어 언어마저 포기한 사람처럼 필요한 말만 한다. 마치 신내림을 받은 사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한 사람같이 느껴진다. 이즈음이 되니 스트릭랜드가 영국에서 그 누구와도 진짜 소통을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태로 17년이었다. 이 정도의 절박함과 단호함, 그림에 대한 진심이 있으니, 그의 가출을 수긍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만난 동료 화가 스트로브와의 에피소드는 그가 천재성을 지닌 화가가 맞았음을, 그의 선택이 필연임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스트로브는 그림을 보는 감식안이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정작 스스로는 관광지 엽서에 들어갈 법한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는 캐릭터다. 그의 감식안은 스트릭랜드가 천재임을 알아본다. 스트로브는 찰스를 예술가로 대접하고 찬사를 전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조롱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가장 소중한 것마저 빼앗긴다. 하지만 스트로브는 찰스의 천재성에 압도되어 그를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 이 정도의 진심과 절박함과 천재성을 가진 자라면, 그런 사람이 17년 동안이나 잠자코 가장 역할을 했다면 떠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공감이 되었다. 동시에 ‘혹시 내 안에도 아무도 몰라주는, 자신도 깨우치지 못한 천재성이 알아봐주길 바라고 아닐까. 가끔 다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것이 그것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서머싯 몸은 마치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 지금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듯 적확한 타이밍에 이런 문구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나의 진짜 삶도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권을 챙겨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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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어지는 스트릭랜드의 타히티 생활기를 읽으며 서머싯 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도망치듯 타히티로 흘러들어간 스트릭랜드는, 현지 여성의 중매로 젊은 원주민 여성 ‘아타’와 여생을 함께 살아간다. 타히티에서 그를 알게 된 선장이 그에게 그녀와 함께 행복하냐는 질문을 하자 스트릭랜드는 “그 애는 간섭을 안 해. 밥도 지어주고, 여자에게 바라는 건 다 해줘”라고 말한다.



찰스에게 있어 타히티에서의 삶과 영국에서 삶의 차이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와, 의식주의 책임이 그에게 있느냐 다른 이에게 있느냐로 보였다. 결국 그도 아내 에이미의 삶을 원했던건 아닐까. 아내 에이미는 찰스의 노동력과 그의 존재에 의지해 본인의 욕망을 실현하며 살았다. 찰스도 에이미처럼 아타의 노동력과 돌봄 덕분에 안정을 찾고 본인의 욕망을 본격적으로 현실화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의 욕망 현실화 프로젝트가 가능한 공간이 꼭 달의 세계, ‘타히티’여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반의 작품이다. 당시의 영국인 독자들은 ‘타히티’를 경험해 보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타히티’라는 공간을 이곳과는 다른 신비로운 ‘달의 세계’로 대상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한국인인 나는 지구상 어디에도 이상적인 ‘달의 세계’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트릭랜드가 타인에게 의지하며 삶을 이어 나가는 서사를 접하는 순간 달의 마법은 깨지고, ‘타히티’는 그저 또 다른 6펜스의 세계의 변주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이 작품이 대상화하고 신비로움을 부여하는 것은 공간이나 사람뿐만이 아니다. 스트릭랜드를 태초의 인간으로 회귀한 것 같이 묘사하면서 인간이 태초에 품은 원시적 ‘창조성’ 그 자체에 신성성과 신비로움을 부여한다. 하지만 인류가 원시적 창조성을 발현한 최초의 회화라 할 수 있는 동굴벽화도 결국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6펜스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 ‘바하’도 누구보다 성실한 음악 노동자였다. 더 깊이 내려가, 임신과 출산이라는 창조 본능의 근원도 인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물학적 목적을 가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스트릭랜드가 추구했던, 서머싯 몸이 그리려던 ‘순수한 달의 세계’는 허구이자 허상에 가깝다.

결국 이곳이 아닌 어딘가 달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이’곳에 6펜스만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허리 굽혀 땅에 떨어진 6펜스를 줍다가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달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꺼내려던 여권은 제자리에 잘 있다. 나의 타히티는 지금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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