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존재를 입증하는 것보다 부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더 어렵다.
신은 존재하는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부뚜막에서 치성드리는 그런 소박한 신앙을 좋아하셨다. 부모님 다 돌아가신 나는 ‘고아’라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까지 절대 고아는 아니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절대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저 하늘만큼은 같이 있지 아니한가’..아..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신의 손길인가, 아니면 인간적 선한 연대인가.
성경에서는 명철에 의지하지 말고 신에 의지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다소 신성 모독적 질문인지 모를, ‘신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세세한 고통까지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이 왜 세상에 이토록 거대한 악을 존재토록 하는가?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세상인 것인가. 그저 세상은 무관심한데 의미를 찾으려는데서 오는 피할 수 없는 부조리인가.
‘신이 없다면 사는 것도 슬프고 신이 있다면 죽는 것도 기쁘다.’ 부친은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길로 진행된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신은 당위다. 애머니즘이든 샤머니즘이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하고, 또 오만해서는 안 되며, 기도로 간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린왕자에 보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대사가 나온다. <invisible thing is important.>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실존하듯이.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신, 바이러스 등등.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사기의 대상이 되곤 한다.
왜냐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이단이 늘 있어왔고, 바이러스도 과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상충되는 논문이 나왔다 사라지고 일부만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한비자에서도 호랑이 그림 그리기가 귀신 그리기보다 어렵다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일명 마인드 컨드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을 사로잡는 원리와 비슷한 것 같다. 사람의 공포심!
철학과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신학이 모든 학문에 앞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철학은 무엇인가.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인가. 그저 형이상학적 사변론인가. 회의하는 것인가. 마르크스처럼 기존의 철학이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었다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념인가. 철학은 질문이고 종교는 믿음이다. 철학은 회의하는 것이다. 지식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극복한다. 일단 올바른 지식으로 위험을 회피하고, 어쩔 수 없는 난관은 살아내는 것이다.
참고 견디다 보면 더 좋은 날이 오리라는 소박한 자세.
우리는 기도한다. 절대자에게 기도한다. 나는 기도한다. 아버지처럼 당당히 이 세상을 검소하게 살아가도록 기도한다. 그럼에도 나는 문학인으로 철학한다. 딜레탕트의 수준이지만 회의한다. 의심과 믿음이 정반합이 이루어지면 뭔가 기록자로써의 자세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과연 그만한 의지가 있느냐가 문제.
종교에서는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빵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목마른 이에게는 한잔 물이 필요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분명 작금의 시대는 정상의 시대는 아니다. 과거 불확실성의 시대니 뭐니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정말 혼란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현명한 선택과 그리고 간구와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평상심과 어머니의 기도로 넘실대는 파고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사람을 믿는 것보다는 신을 믿는 게 낫다. 그런데 피조물은 신이 만들었으므로, 사람을 안 믿는다는 건 신도 불신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을 믿는다는 얘기는 결국 신을 믿는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다신한번 신은 존재하는가? 불가지론적 태도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듯이 지극한 악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신성을 존재한다고 믿는다.
‘낮이 밤을 두려워하지 않듯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거는 존재한 적 없기에 사라질 수도 없다.’ (사실 나의 인식은 삶은 죽음을 두려워한다와 우리는 현재를 살뿐이지만 과거는 존재하는 것)
그러한 모순과 그러한 의지와 기도로 좀 더 신에게 다가가기를 다시한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