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글입니다.
초기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황제의 어원인 카이사르는 라틴어이고 영어식은 시저이다. 최초의 황제로 이 말은 러시아로 넘어가 러시아에선 황제를 차르라고 했다. 카이사르의 생일은 9.23.이다. (23은 시계에선 11로도 표현할 수 있다.) 철학에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철학은 의심이고, 종교는 믿음이다. 나는 의심과 믿음의 정반합이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가는 방편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진실을 다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피조물이 절대자의 뜻을 다 알 수 있을까. 같은 측면이 있는 말이다.
언어는 분별이다. 정의를 내리면서 우리는 문제에 다가선다. 용어전쟁이란 책도 있다. 그들과 우리가 쓰는 같은 단어의 뜻이 다르다. 우리는 언어로 기도를 하고, 주술을 외운다. 언어의 힘을 알기에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물론 말만으로 안되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로써 믿음을 고백한다.
조선시대에 백성은 한자를 모르니 언문이 막혔을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나왔으니 이제 대중도 진실을 알게 됐을까?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다.
티비는 늘 우리 거실을 가득 채운다. 그렇다고 거기서 나오는 내용들이 다 사실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파레토 법칙처럼 80:20으로 나눠야 할 거 같다.
여론과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뭘까? 저 황제처럼 힘이 강한. 성경에선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마귀라고 했다.
소설가 이병주는 알 수 없는 어둠의 힘이라고도 했다. 나는 화폐라고 본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면 그것으로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
‘너희는 나와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아버지는 맹자의 ‘항산항심’ 말을 종종 인용하셨다. 그리고 늘 근검절약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아끼어 자식들 준다고 하셨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 그 돈은 종이 쪼가리이다. 신용화폐라고도 하고, 불환화폐라고도 부른다. 1, 2차 세계대전 후에 소위 기축통화가 바뀌었다.
그리고 작금은 또 화폐가 바뀌는 시대라고 한다.
과거 2천년을 앞에 둔 소위 밀레니엄이라고 부르던 때, 일부 종교에서 말세가 온다고 집단으로 행동하다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특별한 시대라는 의견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탄허스님의 말처럼 통일도 곧 오지 않을까.
최근 최북 화가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렀다. 고흐도 자신의 귀를 짤랐다. 성경에는 자신의 팔이 나쁜 짓을 하면 잘라 버리라고 했다. 한 팔 없이 천국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춘천의 어떤 화가는(박환 화백) 두 눈이 안 보인다는 것에 감명 받은 적 있다. 그는 크리스쳔이다. 성경에서는 장님에 대해 예수에게 묻자 하나님의 다른 뜻한 바가 있다고 했다.(동시에 그가 두 눈이 멀었기에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구절도 기억난다.)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인용하는 것 같다. 이 각박한 세상. 부모님도 이제 안 계시고. 무엇인가 믿어야(의지해야) 하지 않을까. 철학은 질문이고, 언어는 분별이지만. 믿음은 분명 시련을 견딜 힘을 줄 것이다.
‘구름을 움직이는 건 바람이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것 사랑이다.’란 말을 집사람이 어디서 듣고 알려줬다. 멋있는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구름은 바람에 움직이지만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 이것저것에 흔들 흔들 하는 것 같다. 참 견물생심이다. 물건을 참지 못하고 사기, 미혹 등..
화가에겐 그림이 또 하나의 언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그리움을 그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