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일기 - <베타 테스트 中>
1.
서점에서 돈을 쓴다. 일하는데 쓰려고 찾아낸 푸드컬쳐 인터뷰집과 도서관에서 빌려놓고 못 다 읽은 미술 에세이 한 권이 필요했다. 특히 이번에 점찍어 둔 어느 영국계 소설가의 미술에세이는 오래전부터 즐겨듣고 있는 어느 팟캐스트 진행자(내가 참 많이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다.) 가 한시간 넘도록 신이나서 이야기했던 걸 즐겁게 들은 터라 얼른 갖고 싶어지는 물건이었다.
서점에서 필요한 책을 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이대로 물러가기에는 섭섭하다. 지하철에서 열정거장이나 건너온 시간이 괜히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건너온 시간만큼을 서점에서 머무르기로 한다. 서점을 즐겨찾는 편이지만, 서가 하나에서 오래 머무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평소에는 눈길도 안줬을 것에 오랜 시선을 집중력있게 쏟는 날. 오늘은 B구역이라 적힌 서가에서 책등에 적힌 제목이 유난히 눈에 잘 들어왔다.
「춤추는 최승희 -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 뿌리깊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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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에 있던 책등을 손톱으로 긁어 단박에 손바닥에 움켜쥐었다.
2.
표지에는 안그래도 짙은 이목구비가 흑백인쇄 때문에 더욱 선명해진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새겨져있었다. 최승희를 처음 느끼게 된 건, 그러니까 최승희란 사람이 가진 아우라를 선명하게 체험 한 건 몇 해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때였다. 근대의 여성창작자들의 작품세계를 모아놓은 전시였는데, 최승희의 무용영상이 스크린을 통해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거기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가끔 화면에 노이즈가 껴서 자글자글 거리는 화면에서 무대 위를 휙휙 누비는 최승희의 춤은 춤 이상의 무언가를 내게 전해줬다. 최승희의 몸이 춤의 시퀀스를 따라 마디마디 구부러지고 일그러질 때면, 보는 내 감정이 저릿해졌다. 기쁘고 슬프고를 떠나서 심장에 힘찬 파동같은 걸 내게 전해줬다.
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로 기억한다. 개관 30주년 기념 전시였을 거다. '광장'이란 주제로 한국사회를 주제로 한 작품을 모았었는데, '뿌리깊은나무' 라는 출판사의 오래된 동명잡지가 늘어서 있던 곳에서도 나는 오래 머물렀었다. 70년대 이후 한국문화를 둘러싼 소식을 열심히 모은다는 것도 신기했고(유신정권-신군부정권시기에 문화연구에 진심일 수 있는 게 대단하다) 디자인이 지금 기준으로도 세련된 게 좋았고,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붙잡은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참 깊었다. 그러니까 '뿌리깊은나무'는 내게 믿음직스러운 문화콘텐츠를 발행해주는 보증수표로 마음 속에 각인됐다.
4.
나는 왜 이런 기억을 굳이 길게 보태 회상하는가? 그건 지금 이렇게 길게 말로 떠들었던 기억이 '최승희'와'뿌리깊은나무'라는 키워드에 신속하고 망설임없이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어떤 대상에 거침없이 손을 뻗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런 종류의 직관이 대체로 개인의 강렬한 기억이나 무의식적 체험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장부터 바닥까지 빼곡히 서가에 들어박힌 수백권의 책에서 어찌 단 한 권의 책을 망설임없이 뽑을 수 있을까.
5.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가는 책 한 귀퉁이에 이런 말을 적어뒀드랬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을 때, 그것들은 마치 미리 알기라도 하듯 거기에 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살려준다."
원래 사려던 책을 들고와도 하루 종일 가슴이 뭉클해지는 법인데,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리잡고 있던 책을 만나 가슴이 기쁨으로 고동친다. 이에 감각의 일기를 적어둔다.
2021년 5월 23일.
인천 자택서재 한 켠에 머물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