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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4시간전

이러려구 여즉 살아있었지

한여름에 집에 디비 누워 선풍기 맡에 머리 말리며 쓰는 생활수필

0.

나는 지금 내 방 침대 모서리 위에 비스듬히 걸터 누워있다. "이러려구 여즉 살아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어 거꾸로 뒤집어진 상태로 글을 써본다. 요즘 나한테 좀 많이 없는 건 글쓰기를 향한 충동(내지는 정념)인데. 그게 확 살아나서 넘 좋네.


1.

오늘의 하이킹은 15.9km. 오전 9시부터 13시까지 남산-낙산-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시티 하이킹 코오-스! 아주 드물게, 한여름에 비가 그치고 나면 가을아침처럼 날씨가 차가워지는 시간이 있다. 오늘 하이킹이 딱 그랬다. 폴리 소재로 된 긴팔을 입어도 전혀 덥지 않은 남산 속으로 우리는 씩씩하게 달려갔다네. 마치 트레일 러너처럼. 휴직하면서 연구한 서울 시티 하이킹 코스의 장점은 도심 속 휴게 시설 이용이 자유롭다는 점이다.


2.

남산 내려오면 동대입구역에서 바로 커피 수혈이 가능한데, 오늘 마신 커피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맛있었다.  매장도 프랜차이즈 카페 아닌 것처럼 예뻤고. 가정집 세 채를 터서 한지나 오방색 등의 한국 전통 인테리어를 도입한 카페였다. 비가 온 탓인지 평소보다 사람이 적어서 전세내듯 머물러있었다.


동대문을 거쳐 낙산을 오른다. 낙산은 처음만 가파르지 길이 단순하고 쉽다. 성북동 돼지불백 노포를 목표로 씩씩하게 달려가면 오늘의 공동목표 클리어. 불백집에서 공기밥을 거르고 냉면먹었다. 일부러 물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 말고 시큼한 육수에 고추장을 살짝 풀어서 먹는 갈비집 사이드 메뉴 물냉면. 이거지. 이게 여름의 맛이지.


3.

산악회 회원님들과는 와룡공원에서 헤어지고 나는 북악산에서 조금 더 힘을 쏟아보았다. 북악산은 다른 서울 산들과 달리 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좋은 편은 아닌데, 산 속 경치가 빼어나서 좋다. 이끼 낀 바위, 곡선으로 구불구불 휜 길, 커다란 소나무, 가파른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 청와대 뒤편이라 그런지 자연보존이 잘되어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난 다음이면 풀비린내가 많이 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냄새라고 생각한다. 비 올 때 나는 냄새와 깊은 숲 속 피톤치드 합친 거랑 비슷함.


청와대 앞에서 따릉이 뽑고 시청역으로 질주한다. 모친께서 덕수궁 옆 리에주 와플을 정말 좋아하시는데 여기서 자본주의 효도를 실행하고 지하철에 냉큼 올라탔다. 흐르는 땀이 조금씩 식어감을 느낀다. 후우... 오늘 내가 쥐어짤 수 있는 에너지는 여기까지야.


4.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파나소닉 음향시스템을 건드린다. 야마시타 타츠로 <FOR YOU>앨범 A 사이드로 맞춰져 있을텐데 이놈의 카세트 플레이어는 왜 이리 말썽이야 차암 내... 오늘 같은 오후는 시티팝 틀어 놓고 큰 大자로 누워있고 싶구만!



그래 그래. 옳지 잘 나오네 이제. 그래. 한여름 오후 3시에 헐벗은 채로 듣는 <SPARKLE>은 정말 최고야! 마른 수건으로 몸을 말리고 선풍기를 튼다. 선풍기 방향은 침대 모서리 쪽으로. 몸을 뒤집어서 선풍기 앞에 머리를 디밀어야하니까. 창이 서쪽으로 난 내 방으로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쏟아진다. 눈을 감으면서 태양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기분을 만끽한다. 오늘 볕은 구름에 가려져서 그리 뜨겁지 않아. 딱 알맞아. 매일매일의 햇볕이 이런 정도라면 세계는 언제나 평화롭고 아늑할지도.


5.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물먹는 하마 냄새가 났다. 옷에서 나온 먼지와 탈취제가 섞이면 이런 냄새가 난다. 한동안 내가 옷을 집에 많이 들이긴 했지. 예전에는 책 냄새가 많이 났는데 좀 의외군.


감았던 눈을 뜬다.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가 형형색색이군. 새하얀 코튼 셔츠에 비친 햇살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저 뽀송뽀송한 옷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셔츠를 행거에서 낚아 챈 다음에 내 코로 들이미는 엉뚱한 여자가 내년 여름에는 곁에 있겠지? 그러면 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그 위에 뿌리고 입을 맞추며 뒹굴테야.


6.

아 참 바구니에 던져둔 밀린 빨래가 있었지. 폴리 소재라 한꺼번에 몰아넣고 돌리면 된다. 빨래를 돌리는 사이에 저녁밥을 차려먹고. 빨래를 탁탁 털면 오늘 해야 할 일이 끝난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이야기를 마저 쓰려고 한다. 서울 최초의 아쿠아리움, 그리고 한국의 아쿠아리움. 이런 걸 여름에 이야기 할 수 있다니. 올해는 차암 좋은 여름을 맞이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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