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겁을 예쁘게 봐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1.
2025년 10월 어드매쯤 들은 이 말은 올해의 가장 인상깊은 말로 마음에 자리할 것 같다. 이 말을 꺼낸 친구는 한동안 서울을 떠났다가 얼마 전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의 곁에는 짝꿍이 생겼다. 나는 그의 사랑이 요즘 시대에 무척 희귀한 사례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불가해한 직관에서 시작된 애정이기 때문이다.
2.
날짜를 잡고 장소를 골라 젊은 남녀가 만나는 건 그리 유별난 일이 아니겠으나, 눈 앞에 마주한 상대를 보자마자 덜컥 "나 이 사람이랑 같이 살 거 같다." "같이 살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직관이 드는 건 유별난 일이다. 사람은 때때로 그런 마주침을 경험한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마주했던 감정은 모성애로 수렴하는 안쓰러움 아니었겠냐며. 허수경의 시 <폐병쟁이 내 사내>를 인용하며 그 마음을 설명해주었다.
2-2.
허수경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더 읽고 싶은 분은 따로 검색해보시라.
3.
친구는 짝꿍 만나 사귀는 일에는 폐병쟁이 사내같은 이가 덜컥 마음에 들어와버리는 불가사의한 일이 있지 않겠냐며. 자신도 짝꿍의 무언가를 모두 수용할 수 없지만, 이상하리만치 품게 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격려하려는 듯 타이르듯, 내게 이렇게 말했던 거 같다.
정년씨 눈에는 겁이 있어요
그걸 예쁘게 봐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4.
'겁'이라는 한 음절 단어를 듣는 순간, 내가 오랜 세월 애타게 찾길 바란 퍼즐조각이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씨. 딱딱하게 굳어있으려 하기보다는 흐물흐물 어디론가 흐르고자 하는 성질머리. '겁'이라는 단어가 나의 근본적인 성질 하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 모자람없는 표현같아서 조금 신기했다
5.
그리고 그런 걸 예쁘게 봐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말은 어찌나 힘이 되던지! 뒤집어 말하면 내 곁에 머무르는 겁이 껄끄러운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사이도 안된다는 뜻 아니겠나. 지독한 마음이 쉽게 들어차는 30대의 복잡한 마음을 풀어내주는 명료한 진단에 나는 굉장히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요즘 세상 사람들이 둘 중 하나의 마음으로 관계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전자는 다음과 같다. (팔짱을 낀 채로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네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능력이 있어? 그러면 증명해봐." 후자는 다음과 같다.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방법은 나도 잘 몰라. 그런데 너랑 같이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아. 우리 같이 증명해보자."
친구는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인 거 같고, 나도 그 편에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