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난 뒤after'의 감흥을 교환하는 게 영화만큼이나 재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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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는 '영화를 보고 난 뒤after'의 감흥을 교환하는 게 영화만큼이나 흥미로운 영화다. 영화 자체가 주는 감흥을 따지기에 앞서 같이 영화를 보는데 자꾸만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인상 깊은 장면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 친구의 이야기를 먼저 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자리를 떠나 근처 주점으로 몸을 옮겼다. 간단한 안주를 차려둔 채, 영화에서 뽑아낸 장면에 서로의 경험을 하나씩 포개 놨다.
친구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영주 출신, 어렸을 적엔 친가 식구들의 집성촌이 모여있는 영주로 자주 놀러 갔다고 한다. 어느 여름방학의 영주의 한적한 시골, 아침 일찍부터 부모님이 마실 나간 사이에 어린 남매는 아버지가 어렸을 적 살던 낡은 집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멍멍이랑 놀아도 누나랑 테레비를 봐도 시간이 안 가던 어느 오후, 소나기가 한바탕 퍼붓는다. 엄마 아빠 언제 오나 대문 앞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소년은 대문 어귀에 심긴 식물의 잎사귀를 바라본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가 구경한 식물의 잎사귀는 유독 커다랬다. 빗방울에 젖어 축축해지지 않고 외려 맑게 맺힌 방울만 잔뜩 흘려내는 식물,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비를 맞는 줄도 모른 채 빠져들었다고 한다.
집 앞마당에 심긴 식물이 토란이란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지만, 토란이 뭔지 몰라도 한여름에 토란잎이 빗물에 적셔지는 모습은 평생 마음에 맺힌다. <리틀 포레스트>는 유년시절부터 간직해둔 저마다의 향수를 지금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영화다. 친구가 마음속에 평생 간직해둔 씨앗은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만나 비로소 싹을 틔웠다.
'도시가 아닌 곳'에서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추억은 분명 다르다. 시골이 친한 사람과 도시가 친한 사람의 관점은 제법 다르겠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가 '도시가 아닌 곳'에서 체험한 것을 다시 추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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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다. 영화가 맨 처음 보여주는 장면은 앞으로의 이어질 장면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스크린에 비치는 것은 한겨울 을씨년스러운 시골 한옥집. 카메라는 '혜원'(김태리 배우)이 집구석에 쓸쓸하게 누워있다 밥을 지어먹는 모습을 살짝 멀리 떨어진 상태로 잡아낸다. 집주인이 찬거리를 얻어다 밥을 지어먹는 과정을 천천히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보여주기만 하지?" 혜원이 무슨 사정으로 이 집에 들어와 밥을 지어먹는지 당장 알 길이 없다. 다만 느릿느릿한 템포로 한 끼 식사를 지어 올리는 혜원의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주야장천 '인간이 먹고사는 일'을 바라본다.
일찍이 현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예술의 가치가 '재-인식'에 있다는 걸 힘주어 말했다. 타인의 삶으로 미루어 자기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하고, 그것이 좋은 정서를 만들고 예술을 누리는 사람이 덕분에 탁월한 인생을 지어 올리게 된다면 <리틀 포레스트>는 제법 훌륭한 '재-인식'을 만드는 셈이다.
고로 <리틀 포레스트>는 관객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살까'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내가 어떤 공간에 담겨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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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찾아보니 원작은 일본 만화였고, 이미 같은 이름의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됐다. 나는 얼른 일본판 영화를 찾아다 봤다.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만, 상고相考하다 라는 단어가 있다. 예로부터 참고 사례가 될 게 있을지 헤아려 보고 참고 사례가 있으면 견주어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슬기로운 문제 해결 공식이자 예술을 누리는 놀이 방식이다. (*또 상고上告하다는 동음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고전문헌 읽으면 왕이 신하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오늘날 공무집행을 하는 데 있어 과거에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뜻이다. 발음이 같은 단어의 뜻이 어슷비슷 통하니 각별히 아껴 쓰고 싶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에는 혜원(김태리 배우)이 재하(류준열 배우)에게
"어째서 고향에 다시 돌아왔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판은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은 싫었어."
라 답하고 싱긋 웃으며 넘어간다.
한국판의 시퀀스도 제법 인상 깊었는데
일본판은 이 문답問答을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보여주니 따로 기록해봄직하여 가져온다.
<리틀 포레스트>는 동아시아 문화권 특유의 농경문화풍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짜인 영화지만, 한국판과 일본판의 디테일이 서로 달라 나름대로 추려봄직한 아름다움이 있으니 기꺼이 즐겨봄직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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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온 힘을 쏟는 것이 일본판이라면, 한국판은 인물 묘사에 집중한다. 사람과 동물의 백-스토리까지 섬세하게 짜뒀는데, 덕분에 인물이 서로 엮이는 지점이 촘촘하게 묘사된다. 한국판에 나오는 인물은 '비교'에 대한 고민을 꽤 자주 해온 모습으로 비친다. '혜원'은 거듭된 임용고시 탈락에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왔지만 도시에서의 삶과 아주 인연을 끊어버리지 못한 채 내적 갈등을 이어간다. '재하'는 혜원이 했던 고민을 이미 매듭지어 완전 낙향이라는 결정을 내린 상태고, 혜원과 재하의 친구 '은숙'은 도시생활에 대한 동경과 낭만으로 도시와 농촌을 비교한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의 인간군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비교하는 인간상'이다. 비교는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정은 개인이 성장하는 데 있어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동기 motive다. 오늘날 대한민국 2030 세대에게 이보다 더 절박한 물음이 있던가. 현대인의 인생에서 20대에서 30대까지의 인생은 대체로 인정투쟁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남보다 더 낫고better, 남보다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88만원 세대,사토리 세대, n포 세대 온갖 종류의 세대론이 증명하듯,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얻은 인정투쟁은 점점 쓸모 없어지고 있다. 남과 비교하면 내 인생의 못난 점만 두드러지고 못난 점만 보다 보면 멘탈도 못난 생각으로 물든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만의 설정은 인정의 방향이 타인이 아니라 나로 향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내가 납득하고 내가 인정한 것에 무게를 두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타인이 아니라 나와 비교하는 사람. 굳이 비교를 해야 한다면, 내가 몸담은 시공간과 비교를 하자는 것.
이것은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로컬라이징 과정에서 성취한 가장 탁월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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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생활의 고단함이나 불편함을 은폐시키진 않았지만, <리틀 포레스트>는 대부분 농촌생활의 예쁜 것만 골라 보여준다. 영화 관람 일주일 뒤에 생각나는 장면은 농촌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들이다. 맑은 날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상쾌하게 질주하는 모습,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웃고 떠드는 순간들. 눈이 한바탕 내려 새하얀 설원이 펼쳐진 자연의 숭고함은 농촌 생활의 전부가 아니다.
반찬거리를 짓다 보면 꼭 없는 재료가 있기 마련이고, 읍내에 생필품 하나 사러 나가기엔 내내 논밭에서 뒹굴며 일한 피로가 발목을 붙잡는다. 시골 한옥집은 보기에는 예쁘나 관리하자면 성가시리라. 농사는 매해 풍년일 수 없고 태풍에 쓰러진 벼를 세우는데 든 시간은 영화 상영시간보다 훨씬 길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찬물을 끼얹는 현실의 냉소를 굳이 적어놔야 하는 까닭이 있다.
영화는 시간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가 환상적인 까닭인 동시에, 영화에서 편집된 부분을 관객이 비판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리틀 포레스트>가 보여주는 장면은 그저 아름답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현실의 고단함이 자리한다.
영화가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을 동시에 헤아려보자. 환상과 현실을 꽈배기처럼 꼬면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이 보인다. 인생은 방정식이 아니라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지만, 어렴풋한 방향을 일관성 있게 추구하면 탁월한 해답은 얻을 수 있다. <리틀 포레스트>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공간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 '탁월한 삶'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다.
당신이 뿌리내리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영화를 모방할지, 삐딱하게 받아들일지, 일부는 취하고 일부는 버릴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영화 관람 이후에 오는 생각이 '탁월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넓히고 선택의 가짓수를 늘리게 됐다면, 그것은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만든 사람들이 관객들에게 기대하고 원했던 효과와 서로 통할 것이다.
'배우 문소리'의 엄마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일본판에 비해 공들인 설정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엄마'의 역할이다. 한국판이나 일본판이나 엄마는 알쏭달쏭한 말을 적어둔 편지 조각에서, 혹은 주인공이 요리할 때 레시피를 고민할 때, 추억 회상씬에서만 등장하며, 나이에 비하면 젊고 예쁜 외모에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어 뼈 있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란 점은 같다. 그러나 일본판에선 '엄마'가 어떤 사연으로 시골구석에 흘러들어와 사는지에 대한 백-스토리가 없다. 주인공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묘사한다.(아얘 부모의 존재 자체에 그리 큰 값어치를 매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한국판에선 엄마가 아빠를 정말 사랑해서 시골에 내려왔다는 사연이 등장하고, 딸에게 멘토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딸은 엄마를 꽤나 의식하며 산다.
영화 후반에 엄마가 딸을 위해 큰-그림(?)을 설계해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나는 이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얻음직한 가르침'이라 부르고 싶다. 엄마가 딸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인생의 진리는 때를 기다려 수확하는 농사의 이치와 같으니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엄마의 메시지는 영화의 흐름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p.s 『씨네 21』김혜리 기자님의 <영화의 일기>를 오마쥬 하고 싶었던 영화감상문.
영화제 다녀오시느라 <영화의 일기> 연재가 멈췄는데, 김혜리 기자님의 감상을 얼른 듣고 싶다. 그것이 입말이든 글말이든 무엇이든 좋으리라.